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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한국 배구 최고 스타' 장윤창, 지병으로 별세... 큰 별이 지다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5.30 16:08

수정 2025.05.30 16:18

1980년대 한국 배구 이끌었던 최고의 공격수
1978년과 1982년 아시안게임 금메달
1984년 최고 인기수상이자 MVP
한국 배구 최초의 스파이크 서브... 돌고래 별명 가진 왼손 거포
1980-9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년의 '명스파이커' 장윤창 전 경기대 교수가 3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5세. 장 전 교수는 1978년 1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돼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힘을 보탰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3년 고려증권 창단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활처럼 휘어지는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타점 높은 공격으로 '돌고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사진은
1980-9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년의 '명스파이커' 장윤창 전 경기대 교수가 30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5세. 장 전 교수는 1978년 1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돼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힘을 보탰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83년 고려증권 창단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활처럼 휘어지는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타점 높은 공격으로 '돌고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사진은 1990년 2월 12일 대통령배 배구 고려증권과 현대자동차써비스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시도하는 장윤창 모습. 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한국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돌고래' 장윤창 경기대 스포츠과학부 교수가 30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

장윤창 교수는 1978년 인창고 2학년 재학 중 17세의 나이로 최연소 국가대표에 발탁되며 배구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는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4강 진출을 이끌었고, 방콕(1978년)과 뉴델리(1982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한국 배구의 위상을 드높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추가했다.

1983년에는 '조직력 배구'의 선두주자였던 고려증권 창단 멤버로 합류,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함께 실업 배구의 전성시대를 견인했다.

특히 대통령배 원년 대회(1984년)에서는 인기 선수상을 수상했고, 최우수선수(MVP)에도 오르며 프로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 교수의 활약에 힘입어 고려증권은 초대 챔피언을 포함, 총 6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왼손 아포짓 스파이커였던 그는 남자배구 최초로 '스카이 서브'를 선보이며 코트를 누볐다. 유연한 허리를 이용한 타점 높은 공격은 그에게 '돌고래'라는 잊을 수 없는 별명을 선사했다. 장 교수는 남자 배구 '왼손 거포'의 원조로 불리며, 이후 김세진 한국배구연맹(KOVO) 운영본부장과 박철우 우리카드 코치로 그 계보가 이어졌다.

장윤창 경기대 교수.뉴스1
장윤창 경기대 교수.뉴스1

현역 은퇴 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조지워싱턴대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한국체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모교인 경기대학교 스포츠과학부 교수로 강단에 섰다. 대한배구협회 강화이사와 대한민국스포츠국가대표선수회 회장,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했다.

고려증권에서 함께 활약했던 박주점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장은 "장윤창 교수가 작년 말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해 온 것으로 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는 또한 "장 교수는 1980년대 한국 남자배구를 풍미했던 최고의 스타였다"고 회고했다.


빈소는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6월 1일 오전 5시 30분에 엄수될 예정이다.

jsi@fnnews.com 전상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