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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대통령' 이상훈, 애니선 미소년…"캐릭터와 물아일체가 중요하죠"

뉴시스

입력 2025.06.03 09:03

수정 2025.06.03 09:03

'격동50년' 박정희·김영상·노무현 前 대통령 목소리 주인공 애니 '헌터x헌터'·'프린세스 츄츄' 미소년 목소리 연기도 영화 '황산벌' 그 신라군…드라마 '비밀의 화원'·연개소문 조연도 3일 개막 연극 '마가렛 화인' 출연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

라디오에선 배우 이상훈(54)이 대통령이다. 라디오 청취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MBC 표준FM(95.9㎒)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50년'에서 그는 전직 대통령들의 목소리를 똑같이 흉내 냈다.

최근 서울 안국동에서 만난 이상훈은 "'격동50년' 덕분에 라디오 드라마계에선 제가 BTS급이었어요. '성우를 그만해도 한이 없다'라고 말했던 이유는 대통령 세 명을 했기 때문이었죠"라고 말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소리는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국회의원 시절부터 맡아왔기 때문에 '같이 대통령이 된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캐릭터 연구를 하면서 인간적인 매력을 더 알게 됐어요. 대통령 취임식 때 초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지리산 인근에서 태어난 이상훈은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80년대 후반 서울로 올라와 홍대, 신촌 앞에서 연극을 했다. 당시 대학로 못지 않게 공연이 활성화돼 있던 그곳에서 윤대성 '방황하는 별들',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을 올렸다. 백화점 문화센터 등 공연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친구따라 시작한 연극이었는데 친구는 연극판을 진즉에 떠났고 그만 남았다.

이상훈은 "무대가 희한한 마술 같은 공간이더라"고 돌아봤다. "제가 뭘 해도 되는 공간이잖아요. 내가 아닌 또 다른 어떤 존재로 자유롭게 태어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전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갇힌 교육 자체가 억울했거든요."

그렇게 공연을 하다 기본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늦게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대학로를 누비다 1999년 MBC 성우 공채 15기로 입사했다. 남다른 발성톤을 지닌 그에게 성우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계속 시험을 치르다 마침내 합격했다.

어린 시절 '출동! 에어울프' '전격 Z 작전' '600만불의 사나이' '맥가이버' 등 외화를 보다 캐릭터의 목소리가 너무 신기하게 느껴져 방송국에 편지를 보냈다. '600만불의 사나이' 주인공 목소리를 맡은 대선배 성우 양지운과 2000년대 초반 MBC TV '애들이 줄었어요' 외화 시리즈를 함께 했을 때의 벅참은 이루어 말할 수 없다.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이상훈은 적당히 묵직하면서 믿음을 주는 '잘생긴 목소리'를 갖고 있다. 외화·애니메이션에서 미남 캐릭터 목소리 연기를 도맡아온 이유다.

대표적인 인물이 'CSI 마이애미'에서 배우 에디 시브리언이 연기한 제시 카르도자. 시브리언은 국내 배우 오지호 닮은 꼴로 알려졌다. 평소 익살스러운 목소리를 갖고 '분위기 메이커'로 통하는 이상훈은 "입금 안 되면 내가 성우인 줄 아무도 모른다"고 껄껄댔다.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특히 이상훈의 존재감은 남다르다. '헌터x헌터' 샤르나크, '프린세스 츄츄' 아오토아, '흑집사' 언더테이커 같은 미소년 목소리가 그의 전담 영역이었다. "'아오토아'는 10대 고등학생이었어요. '얘들아 좀 조용히 해주겠니. 공부 방해가 되잖아' 같은 대사를 했죠. 하하."

이상훈은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에 대해 "작품을 보고 재미있어할 아이들의 표정을 생각하면 신이 났었다"고 웃었다.

김수용의 '힙합', 전극진·양재현 '열혈강호' 등 만화를 오디오 드라마로 만든 MBC 라디오 '만화열전' 등 이상훈의 성우로서 대표작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이상훈은 성우들이 맡을 수 있는 CF계의 최고봉인 고급 자동차 광고도 이미 섭렵했다. 고가인 자동차 CF에서 신뢰를 안기는 목소리는 필수적이다. CF 카피를 녹음할 때 녹음실에 수십명의 관계자들이 모이는 까닭이다. "시대의 언덕을 넘어 세상을 이끌어온 당신! 당신께 오마주 합니다"라는 K-9 CF 목소리가 바로 이상훈의 것이다. 이 CF가 나온 해에 해당 차가 엄청 많이 팔렸다는 전언이 있다.

이상훈을 성우 아닌 배우로 각인시킨 작품은 영화 '황산벌'(2003)이다. 말빨로 백제군을 농락하다가 오히려 능욕당하는 신라병사를 맡아 '신 스틸러'가 됐다.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성대모사의 달인인 이상훈은 캐릭터 묘사의 고수이기도 했다. '황산벌'을 비롯해 지역 토박이를 다수 연기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룬 만화가 강풀 웹툰이 원작인 영화 '26년'(2012)의 '심미진'(한혜진 분) 부친, 충청도가 배경인 JTBC 드라마 '나쁜 엄마'(2023)에서 양조장 박수무당 '양씨'가 대표적이다.

"'26년'은 영화 초반에 죽는 역할이지만 영화에 캐스팅된 직후 광주로 내려가 금남로 뒤에 여인숙을 잡아놓고 한 두어 달 가까이 있었어요. 광주 분들 만나고, 민주화운동 하시다 돌아가신 유가족분 만나면서 얘기를 들었어요. '나쁜 엄마' 때는 전국 무당들 만나기 위해 굿판 쫓아다니고 아는 무당 연결 또 연결해서 의상과 액세사리 고증도 받았죠. 연기를 위해선 제가 진짜 그 인물을 알아야 해요."

이상훈은 배우들의 배우로도 유명하다. '26년'에서 딸을 연기한 배우 한혜진은 그의 제자다. 배우 배용준도 이상훈의 연기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훈은 연극 연출가 겸 영화감독인 장진 사단의 중요 인물 중 한명이다. 두 사람은 서울예대 재학시절 같이 학교를 다녔다. 이상훈은 장 감독의 연극 입봉작 조연출을 담당했고, 영화 입봉작인 '기막힌 사내들'에선 출연과 함께 조감독을 맡았다. 연극 '서툰 사람들', 영화 '간첩리철진' '굿모닝 프레지던트' 등 장 감독과 함께 한 작품이 십여 개가 된다. 배우 차승원 주연 영화 '아들'에선 교도관 '박한강' 역을 맡아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11년 장 감독 연출로 tvN 코미디쇼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코리아' 론칭 당시에 합류도 했다. 이후 안철수 현 국민의힘 의원을 패러디한 캐릭터 '안쳤어'로 크게 주목 받았다. 뒷날 이상훈을 직접 만나 안 의원이 그와 함께 기념사진을 먼저 찍자고 제안한 건 유명한 일화다.

이상훈은 SBS TV '바람의 화원', '연개소문'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등장했다. 특히 '용의 눈물'로 유명한 드라마 작가 이환경 씨가 쓴 '연개소문'은 100부작 대작이었는데 중간에 배우들이 물갈이가 됐음에도 이상훈은 한동안 더 살아남았다. 이 작가가 "목소리 참 좋다"며 이상훈의 역할 생명력을 늘린 것이다.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서울=뉴시스] 김혜진 기자 = 배우 이상훈이 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더한옥에서 뉴시스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5.06.03. jini@newsis.com
인공지능(AI)에 앞서 AI보다 더 다양한 목소리를 빚어낸 이상훈은 최근 AI 합성 목소리에 대해 "인간적인 면모를 만나지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아울러 유튜브 등에서 유명 성우 목소리를 불법적으로 덧입혀 만든 소리들에 대한 저작권 문제를 꼬집었다. "귀한 목소리를 불법적으로 이용하는 거잖아요. 성우들은 캐릭터마다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는데 말이죠. 기계랑 하는 거랑 인간이 하는 건 호흡부터 달라요. AI는 감정 변화 없이 똑같잖아요. 상황이 변하면 그 장면이 돋보이게 성우들은 순발력을 갖고 대응하는데 AI는 그걸 아직 해낼 수 없거든요."

이상훈 다시 연극 판에 돌아왔다. 3~8일 대학로 스카이씨어터에서 공연하는 '마가렛 화인'을 통해서다. 김정선 작·연출의 이 연극은 대한민국 교육 1번지 대치동이 배경. 오로지 내조와 육아만을 위해 살아 온 중년 여성 '화인'이 운명적 사랑 '정혁'을 만나면서 잊고 살았던 자신의 진짜 감정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이상훈은 주연이 아닌 코러스로 출연한다. 그가 맡기엔 배역이 작지만 절친한 김 연출이 자신의 이야기를 녹인 작품인 만큼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예쁘고 잘난 애들 서포트하자는 마음"으로 연극에 임하는 중이다.
"연극은 다 같이 무대에 올라가면 다 주인공이지요. 하하."

연극, 외화·애니메이션 더빙, 라디오 드라마, TV 드라마, 영화 등을 오가는 무경계 배우인 이상훈은 연기 플랫폼이 달라도 공통적으로 지키는 가치관이 있다. "인물과 완전히 동화되지 않으면, 즉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면 전 굉장히 불안해진다"고 털어놨다.


"그 인물이 돼야 하죠. 아니 그 인물을 넘어선다는 목표를 가지고 무대든 스크린이든 브라운관이든 임해요. 그 인물만 있고 저는 없어지는 거죠. 그건 캐릭터에 대한 진정성이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많은 것들을 가져다 녹여내야 해요. 한 인물이 새로 태어나듯이 해야 하는 거죠. 즉 캐릭터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돼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 발로 뛰어야 해요. 내 몸 안에 진짜로 그 인물이 들어와서 말을 내뱉고 또 행동해야 하니까요. 이 사람한테 몰입해 있으면 한동안 잘 빠져나오고 싶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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