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기자수첩] 가지뻗기의 힘

이동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6.15 19:31

수정 2025.06.15 19:31

이동혁 산업부
이동혁 산업부

"PET, PE, HDPE, LDPE, PP, PVC, PS."

암호처럼 느껴지는 약어들의 행진. 처음 이 단어들을 마주했을 때 눈앞이 아득해졌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같은 PET라도 페트,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폴리에스터 등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릴 만큼 복잡하다. 새로 맡게 된 정유·석유화학·철강 산업의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미로 같았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항공·조선·방산 업계를 취재했다. 제주항공 참사,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KDDX 구축함 등 굵직한 이슈들을 따라가며 업계의 흐름을 익혀가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은 산업도, 용어도, 마주하는 사람도 모두 달라졌다. 전투기와 유조선, 플라스틱과 철강. 겉보기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세계다.

하지만 시선을 달리하자 산업 간의 연결고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각자 다른 길을 걷는 듯한 산업들도 실은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가지뻗기(branching out)' 구조 속에 긴밀하게 얽혀 있다. 예컨대 국제유가가 오르면 정유업계는 마진 개선으로 웃지만, 항공사는 비용 부담에 울상을 짓는다. 후판 가격이 오르면 철강사는 수익을 내지만, 조선사는 수익성이 악화된다. 언뜻 보면 무관해 보이는 산업들도 실제로는 하나의 흐름 속에 연결돼 있다. 과거의 취재가 여전히 현재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이유다.

기자에게 가지뻗기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취재란 사건과 사람, 숫자와 정책 사이에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겉보기엔 무관해 보였던 정보들이 어느 날 하나로 이어지며 새로운 가지를 틔우고 그것이 또 다른 기사의 뿌리가 된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흐름으로 맞춰진다. 가지뻗기에 필요한 건 낯선 영역을 마주할 용기다. 관련 없어 보이던 인터뷰 하나, 숫자 하나, 메모장에 남겨둔 문장 한 줄이 시간이 지나 새로운 가지를 틔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연료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이유, 철이 물 위를 떠다니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물론 지금 이 기사 하나하나가 어디로 이어질지 때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과 현장, 데이터는 결국 어딘가에서 하나의 가지로 이어져 있다. 지금은 작고 가느다란 가지일지라도 애정을 담아 취재를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단단한 가지로 뻗어갈 것이라 믿는다.
취재는 선형이 아니라 방사형이다.

moving@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