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LG화학, 메디톡스, 효성이 국내기업과의 기술분쟁에서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장이 커서가 아니다. '공정한 게임의 룰', 바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디스커버리(Discovery)제도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기술탈취가 어렵고 스타트업 인수합병(M&A), 기술거래가 활발하다. 공정한 룰이 있으니, 기술시장도 활성화되는 것이다.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지금 기술탈취 피해자들은 총알 없는 빈 총으로 법정에서 싸우고 있다. 한국은 이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것이다. 기술침해를 당해도 이를 증명할 적절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길은 침해자에게 정당한 배상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침해 내용을 알아낼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침해 내용은 침해자가 보유하고 있는데, 침해자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제출을 거부하면 어쩔 수 없다. 결국 피해자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여 피해를 보상받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선진국에서 도입한 제도가 디스커버리제도다. 특허청에서는 선진국의 디스커버리제도를 보완하여 한국형 증거조사제도(디스커버리)를 제안했다.
한국형 증거조사제도는 판사가 지정한 전문가만 상대방(침해자)의 자료를 열람하여 판사에게 보고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판사가 지정한 전문가는 비밀유지 확약을 한 후 자료를 열람하기 때문에 비밀유출의 위험성이 거의 없다. 이러한 방식은 이미 선진국에서 널리 시행되어 검증된 해결책이라 볼 수 있다.
한국형 증거조사제도가 필요한 이유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피해기업의 절반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기한다. 2023년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특허 보유 중소기업 10곳 중 1곳 이상이 피해를 당했다. 그런데 피해기업 44%는 대응도 못했다. 둘째, 중소벤처기업들이 현장에서 절실히 원하고 있다. 2020년 조사에서 벤처기업 78%가 한국형 증거조사제도에 찬성했다. 특허침해를 경험한 기업은 80%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셋째, 우리는 국제적으로도 뒤처져 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과 유럽도 증거조사제도를 도입했다.
일부 우려도 있다. 영업비밀 유출, 소송비용 증가, 외국기업의 소송 남용이다. 그러나 대부분 오해이거나 보완 가능한 문제다. 우선 영업비밀 유출은 미국, 일본, 유럽에서도 사례가 거의 없다. 조사개시 결정 시 이의신청, 대리인만 증거 열람, 비밀유지명령 등 다양한 안전장치가 반영되었다.
소송비용 증가도 과도한 우려로 보인다. 증거조사제도는 기술탈취 피해기업이 신청한 경우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증거가 제대로 수집되면 소송은 오히려 빨리 끝난다. 실제로 미국은 디스커버리 덕분에 93% 이상이 본안 소송 전에 화해·취하로 종결된다고 한다. 외국기업 소송 남용도 기우이다. 먼저 도입한 유럽과 일본도 외국기업 소송이 급증했다는 데이터는 없다.
이재명 대통령도 공정경제를 위해 한국형 디스커버리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대법원도 지난해 반칙과 거짓 없는 법정을 위해 디스커버리 도입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변호사협회 등 전문가들도 강력 요구하고 있다. 국회의 결단만 남았다. 한국형 디스커버리는 우리 경제와 국가에 창의를 불어넣는 불쏘시개가 될 것이다.
이광형 국가지식재산위원회 공동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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