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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머릿속에서 발굴한 고대도시…대니얼 아샴 '기억의 건축'

연합뉴스

입력 2025.07.10 16:41

수정 2025.07.10 16:41

'상상의 고고학' 구현…한국서 세 번째 전시
여인의 머릿속에서 발굴한 고대도시…대니얼 아샴 '기억의 건축'
'상상의 고고학' 구현…한국서 세 번째 전시

Stairs in the Labyrinth (출처=연합뉴스)
Stairs in the Labyrinth (출처=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고고학이라고 하면 현대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딴곳에서 잃어버린 고대 도시를 찾는 거창한 작업을 떠올리게 된다.

서울 강남구 소재 페로탕 서울에서 10일 시작한 미국 현대 미술 작가 대니얼 아샴(45)의 개인전 '기억의 건축'에는 이런 관념을 뒤집는 작업물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는 고대 신화에서 한 번쯤 본 듯한 젊은 여성의 흉상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여성의 두개골 한쪽 측면과 흉부 인근에 고대 신전 혹은 도시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세밀하게 가공돼 있다. 성인 남자 몸통 크기의 흉상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부위에 고고학적 발굴을 넣은 것과 같은 모습이다.



'미로 속 계단'(Stairs in the Labyrinth)이란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최근 아샴이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을 관통하는 개념인 '상상의 고고학'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과정을 볼 수 있는 습작들도 함께 걸려 있다. 아샴은 목탄 드로잉을 반복해 그리며 여성의 머릿속에 계단을 비롯한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는 형상을 어떻게 구현할지 궁리를 거듭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재료는 모래였다.

"모래는 원래 연약하고 일시적이라고 여겨지는 재료인데요. 이번에는 이것을 제가 전에 했던 작업에서 썼던 재료처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대니얼 아샴 (출처=연합뉴스)
대니얼 아샴 (출처=연합뉴스)

아샴은 전에는 크리스털이나 화산재를 사용해 작업했다.

그는 회화와 드로잉에서도 고고학의 현장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을 보여줬다. 일련의 작품에는 문명과 단절된 것 같은 밀림 속에 폭포수가 떨어지고 있고 폭포 위에 거대한 얼굴 조각상이 배치돼 있다. 조각상을 향해 접근하거나 멀리서 이를 바라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고 실루엣 정도로 표현된 사람들을 통해서 관객은 조각상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된다.

The Wanderer and Their Dog (출처=연합뉴스)
The Wanderer and Their Dog (출처=연합뉴스)

고고학적 발굴로 유명한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을 여행하고 드로잉 북을 만든 경험이 작가에게 영감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아샴은 회화와 드로잉 속 인물이 거대한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어 뒷모습으로 표현된 것에 대해 "관객이 인물에 스스로를 이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다소 기이하게 변형해 과거의 소재를 현대적인 분위기로 재구성했다.

Amalgamized Venus of Arles, 2023 (출처=연합뉴스)
Amalgamized Venus of Arles, 2023 (출처=연합뉴스)

아프로디테를 고광택 스테인리스 스틸, 녹슨 것처럼 표현된 청동, 금빛으로 연마된 청동 등으로 구성한 것이다. 머리, 흉부, 복부와 허벅지 부위를 각각 비스듬하게 경계로 삼아 높이 2m 조형물이 입체적인 콜라주처럼 보이도록 작업했다.

이 작품은 아샴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수년간 창작 공간을 두고 있던 시절에 만든 것이며 원작은 기원전 1세기 그리스에서 제작되고 17세기 프랑스 아를에서 발굴된 테스피아이의 아프로디테상이다.

당시 아샴은 고대 조각의 크기와 동일하게 복제한 루브르 소장 석고상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조형물을 제작했다.

분재를 소재로 한 드로잉도 눈길을 끈다.

Olive Bonsai Stucy, 2025 (출처=연합뉴스)
Olive Bonsai Stucy, 2025 (출처=연합뉴스)

작은 올리브 나무가 앰프처럼 생긴 화분에 심겨 있고 이 나무와 앰프는 구리 선으로 이어져 있다. 나무에서 나오는 소리가 앰프에 입력돼 재생될 것 같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아샴이 작가 활동을 하면서 처음 방문한 미국 외 국가는 일본인데, 그곳의 오랜 분재 문화를 현대 문명의 산물과 연결한 것이다.
아샴은 '미로 속 계단'이 드로잉에서 시작된 것처럼 분재 그림 역시 나중에 조형물 등으로 만드는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했다.

아샴은 2017년 서울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었고 지난해 대규모 회고전으로 관객을 만난 데 이어 이번에 세 번째로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는 다음 달 16일까지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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