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더운 날, 굳이 뜨거운 음식을 먹을까?
매년 7~8월,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시기가 되면 초복, 중복, 말복이 차례로 찾아온다. 이를 통틀어 ‘복날’ 또는 ‘삼복(三伏)’이라 부르며, 이 무렵의 폭염은 흔히 ‘삼복더위’로 불린다.
‘복날’의 ‘복(伏)’자는 ‘사람(人)이 개(犬)처럼 엎드려 있다’는 의미로, 폭염에 기력이 쇠한 상태를 절묘하게 표현한다. 이런 날 굳이 뜨거운 음식을 찾는 이유는 동양의학의 지혜에 뿌리를 둔다. 여름철 과도한 땀 배출은 체내 수분과 기력을 빼앗고, 체온 유지를 위해 혈액이 피부로 몰리면서 상대적으로 소화기관은 차가워지고 기능이 떨어지기 쉽다. 이를 ‘속이 차다’고 진단하고, 따뜻한 음식으로 양기를 보충해 몸의 균형을 되찾는 것이 바로 보양의 핵심 원리 '이열치열'이다.
반면 서양에는 이열치열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여름철 음식 문화도 시원한 요리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물론 땀으로 빠진 수분과 영양을 보충하는 음식은 존재하지만, 대부분 차가운 형태라 ‘보양식’이라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장어젤리’는 장어를 푹 삶아 차갑게 굳힌 음식이며, 스페인의 ‘가스파초(Gazpacho)’는 토마토와 오이, 양파, 마늘 등을 갈아 만든 대표적인 냉수프다.
복날 대표 보양식을 가리자면
복날 보양식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삼계탕이다. 닭 속에 찹쌀과 인삼, 대추 등을 넣고 푹 끓여낸 삼계탕은 뜨겁고 든든한 한 끼로 복날 식탁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의외로 삼계탕의 역사는 길지 않다. 지금의 삼계탕은 1950년대 후반, 닭국에 건조 인삼 분말(백삼가루)을 넣은 ‘계삼탕’에서 유래해, 1960년대 들어 대중식당을 중심으로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비교적 근대적 음식이다.
복날의 전통 강자는 단연 개고기를 끓인 ‘개장국(보신탕)’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저서 《경도잡지》에서 “삼복에 개장국을 먹고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강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당시 개장국은 논쟁의 여지 없이 복날 최고의 보양식으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는 복날의 왕좌를 뒤흔들었다. 개 식용 문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지고 지난해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개장국은 이제 역사 속으로 쓸쓸히 사라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는 개고기를 대체할 보양식으로 ‘흑염소탕’이 주목받고 있다. 개고기와 비슷한 식감과 조리 방식 덕분에 수요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따르면, 국내 염소고기 수입 검역량은 2021년 2027톤에서 2024년 8349톤으로 4배 이상 증가했다. 관세청 집계에서도 올해 5월까지의 수입량은 3856.5톤으로, 전년 동기 대비 35%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아직은 높은 가격과 유통망의 한계로 대중화까지는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집에서 나 혼자", "복날에 채식"... 달라지는 복날 문화
복날이면 어김없이 삼계탕집에 줄이 늘어서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외식 물가 상승으로 부담이 커지면서, 복날 보양식을 집에서 해결하려는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삼계탕 한 그릇 가격은 1만8000원에 육박한다. 한국소비자원의 가격정보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지난 5월 서울 지역 삼계탕 평균 가격은 1만7654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4.6% 상승했다. 업계는 초복 무렵 2만 원을 넘길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외식 대신 간편하고 저렴한 ‘가성비 보양식’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편의점 업계는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춰 삼복 시즌 한정 간편식을 잇따라 출시하고 있다. GS25는 닭다리누룽지삼계탕(6900원)과 한마리민물장어덮밥(8900원)을 선보였으며, CU도 복날 보양식을 겨냥해 통 민물장어 정식(9900원)과 훈제오리 정식(6900원) 등 보양 도시락 2종을 내놨다. 세븐일레븐은 종합식품기업 하림과 협업해 ‘세븐셀렉트 영양반계탕’을 출시했다. 국내산 닭 반 마리에 수삼과 찹쌀을 넣어 전문점 수준의 맛을 구현했다는 설명이다. 이 제품은 삼복 시즌 한정 수량으로 판매되며, 1+1 상시 행사와 카카오페이머니 결제 시 30% 추가 할인 혜택이 적용돼 약 1만1000원에 구매할 수 있다.
실속형 보양식이 주목받는 가운데, 복날 식탁에 ‘채식’이라는 새로운 흐름도 등장하고 있다. 여름 복날 시즌에는 닭고기 도축량이 급증하는데, 축산업이 기후위기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며 이를 꺼리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축산물안전관리시스템에 따르면 1년 중 닭 도축량이 가장 많은 달은 복날이 포함된 7월로, 지난해 7월 한 달 동안만 약 1억1066마리가 도축됐다. 이는 월평균 도축량인 약 8520만 마리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육류 중심의 보양식 대신 콩국수, 채개장, 버섯전골 등 식물성 재료를 활용한 대체 보양식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초복을 맞아, 당신의 식탁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긴 한 그릇이 오를까.
'디깅 digging'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땅을 파다 dig]에서 나온 말로, 요즘은 깊이 파고들어 본질에 다가가려는 행위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주말의 디깅]은 한가지 이슈를 깊게 파서 주말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sms@fnnews.com 성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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