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허제도는 혁신가의 창의적인 결과물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하고, 그 기술을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공중의 이익을 실현하는 균형의 예술이다. 나아가 글로벌 기술 전쟁 시대에 우리 수출 기업들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첨단 무기를 관세 없이 생산하고 수출하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혁신가들, 그들을 대리하는 변리사, 그리고 공익을 대변하는 특허청 심사관이 있다. 이 세 주역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비로소 특허 시스템이 굳건히 서서 기술강국의 발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이들 특허 시스템의 주역들이 소외되고 있다.
우리 특허청 심사관들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과도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나라 심사관 1인이 연간 처리하는 특허 건수는 중국 심사관의 2배, 미국·유럽의 3배에 달한다. 경쟁국의 절반에 불과한 심사 투입시간은 필연적으로 품질 저하를 부른다. 과거 2001년부터 2006년 사이 특허청은 심사관을 99% 증원하여 평균 심사 처리기간을 9.8개월까지 단축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2007년에는 한국어가 특허협력조약(PCT) 국제공개어로 채택되고, 세계 5대 특허청(IP5)의 창립 회원국이 되는 성과를 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은 길지 않았다. 이후 2024년까지 심사관 충원이 멈추다시피 하여 심사 처리기간이 다시 16개월로 늘어났다.
급변하는 기술 시장에서 16개월이라는 시간은 기술의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치명적인 시간이다. 특히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우선권 기간인 1년 이내에 국제특허 확보 전략을 짜야 하는 기업들에 10개월 이내의 신속한 심사 여부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심사관을 대폭 증원하여 심사 품질을 높이고, 나아가 '지역특허 심사센터'를 설립하여 지역의 기술 발전과 혁신을 현장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혁신가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인 변리사들 역시 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난 20년간 거의 오르지 않은 수임료는 주요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심사관과 마찬가지로 낮은 수임료는 특허 1건당 투입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져 고품질의 특허 명세서 작성을 어렵게 만든다.
더욱이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에서조차 혁신가의 법률 대리인인 변리사는 소외되고 있다. 특허 침해소송과 증거 조사에 있어서 변호사만이 주도적인 역할 수행자로 한정되는 것은 제도의 실효성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다.
모두가 기술개발 경쟁에는 충분한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이 모든 노력이 '사상누각(沙上樓閣))처럼 위태롭다고 하는가. 기술개발이라는 화려한 건물을 떠받쳐야 할 '특허제도'라는 기초가 모래처럼 부실하기 때문이다.
충분한 시간이 투입되지 못한 특허 명세서는 '약한 특허'의 시작이다. 이를 이어받은 심사관 역시 부족한 시간 속에서 깊이 있는 심사를 하기 어렵다. 이렇게 탄생한 특허는 높은 무효율, 낮은 소송 승소율, 미미한 손해배상액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로 돌아온다. 결국, 막대한 연구개발(R&D) 투자가 보호받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기술 강국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데서 시작된다. 좋은 기술을 고품질의 특허로 신속하게 확보하고, 그 권리를 튼튼하게 지켜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 더 이상 특허제도의 주역인 혁신가, 심사관, 변리사가 소외되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강민 대한변리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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