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풍경’
시대와 사회가 만든 한계가 조금씩 깨어지고, 경계가 무너지던 시기를 맞으면서 천경자는 새로운 경험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해외 이동이 매우 제한적이었던 때에도 여러 차례 해외를 경험하고 돌아와 느낀 감흥을 예술적으로 풀어냈다. 특히 1983년 해외여행이 조건부 자유화되면서 스케치 기행을 본격화하며 '풍물화'라는 개성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풍경(사진)'은 북해도 북동쪽 오호츠크 해 연안을 마주했던 작가의 여정을 따르게 하는 작품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던 한국을 벗어나 이국적 풍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작가가 느꼈을 설렘과 드넓은 자연이 자아내는 신비로움이 담겨 있다.
봄부터 가을에 걸쳐 다양한 꽃들이 계속 피어나는 북해도는 천경자에게 생경한 풍경이었다. 시야 가득 펼쳐지는 거대한 풍경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주황색의 애호박나리와 노란색의 애기붓꽃을 풍성하게 배치하고 푸른색의 층층이부채꽃과 자주색의 해당화 등으로 색감을 더했다. 뒤편 경관에는 좌우로 원추리꽃과 한 쌍의 새를 묘사해 마치 초여름 아침의 화원을 산책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수백 종의 식물과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가 보존된 초원과 산, 그리고 그곳에서 흐르는 물이 푸른 오호츠크 해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풍경이 크지 않은 화폭에 빠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이 풍경은 천경자의 기억과 감회를 환상적으로 연출해내 작가가 '영혼의 화가',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증명하고 있다.
이현희 서울옥션 아카이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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