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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촛불시위 사진 꺼낸 협상팀…美 쇠고기 압박 꺾었다

박지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7.31 14:00

수정 2025.07.31 14:00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 회의실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면담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 회의실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과 면담을 나누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제공
[파이낸셜뉴스]“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사진을 들고 다니며 설득했다.”
한미 무역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30일(현지시간),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백브리핑을 통해 이 같은 협상 뒷이야기를 전했다. 미국이 농축산물 추가 개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한국 정부는 “(2008년 소고기 시장 개방 당시) 광장에 100만 명이 모인 나라”라는 정치적 현실을 앞세워 민감 품목을 끝까지 방어해냈다는 것이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쇠고기 30개월령 연령 제한 완화와 쌀 시장 추가 개방을 요구했다. 특히 쇠고기의 경우, 미국 측은 “30개월령 수입 제한을 유지하는 국가는 한국·러시아·벨라루스뿐”이라며 규제 완화를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정부는 협상 초반부터 “농산물은 정치적·경제적으로 가장 민감한 레드라인”이라 못 박고, 방어 전략을 고수했다. 여 본부장은 “이미 한미 FTA를 통해 농산물은 99.7% 개방된 상태고, 한국은 미국산 농산물 수입 3위 국가이자 쇠고기 점유율 1위 국가라는 점을 반복 설명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시점부터는 2008년 촛불시위 당시 광화문 전체에 100만 명이 모여 있었던 장면을 담은 사진을 들고 다녔다”며 “USTR 대표와 상무장관 등을 만날 때마다 보여주며, 한국에서 이 사안이 단순한 무역 이슈가 아니라 정치적 리스크라는 점을 감정적으로 설득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이날 발표된 합의문에는 농축산물 추가 개방 항목이 포함되지 않았다.

자동차 관세는 기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12.5%보다 높은 15%로 타결됐다. 여 본부장은 “협상 초기부터 FTA상 기준인 12.5% 적용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일본이 먼저 15%에 합의하면서 그 이하로는 어렵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이 먼저 타결한 이후, 미국 자동차 노조 등의 반발이 커졌고, 협상이 지연되면 15%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복잡한 크레딧 제도나 쿼터 조건 없이 단순 관세 구조로 합의된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오히려 예측 가능성이 있는 결과”라고 평가했다.

반면 철강은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도 못했다. 기존의 50% 고율 관세는 그대로 유지된다. 여 본부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에 대해 매우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고, 앞서 일본과 유럽연합(EU)도 철강은 협상에서 제외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관세 발효일인 8월 1일을 앞두고, 협상팀은 시한과의 싸움을 벌였다. 여 본부장은 “미국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뉴욕 자택에 머물면 그곳으로, 스코틀랜드에 가 있으면 그곳으로 따라가 자정이 넘은 시각까지 협상을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특히 러트닉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과 가까운 ‘딜메이커’였던 만큼, 실무 협상의 주요 고비마다 결정적인 조언을 했다고 밝혔다.

여 본부장은 “협상이 빠르게 전환점을 맞은 건 미국과 일본 간 무역 합의가 발표된 직후, 러트닉 장관이 먼저 ‘직접 만나자’고 제안한 순간부터였다”고 말했다.
“트럼프와 직접 마주하는 상황에 대비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하는지도 러트닉이 조언해줬다”고 덧붙였다.

여 본부장은 “이번 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트럼프식 보호무역이 미국 내 주류로 자리 잡았고, 규범보다 정치 논리가 앞서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번 합의는 소나기를 피한 것일 뿐, 언제든 다시 위기는 닥칠 수 있다”며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고 있고, 기업은 스스로 체질을 바꿔야 하며 정부는 제도적 선제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aber@fnnews.com 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