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이 되면 일본 총리는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읊조린다.
이런 집단 기억상실은 일본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일본에서 패전일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식 문서는 물론이고 교과서, 언론 보도, 심지어 시민단체에서도 조심스럽다. 종전일이라는 표현은 그저 전쟁이 끝났음을 말할 뿐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왜 끝났는지를 묻지 않는다. 일본은 이날을 슬픔의 날로 기억하길 원하지만 그 슬픔의 출처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마치 '우리도 고통을 겪었다'는 피해자 코스프레만 부각시키며 가해의 역사는 조용히 숨긴다. 불편한 것에는 뚜껑을 덮는 게 오래된 일본의 사고방식이다.
젊은 사람들은 좀 다르다? 여론조사를 보면 일본의 20~30대 중 절반 이상은 8월 15일이 무슨 날인지 잘 모른다. 과거를 잘 모른다기보다는 굳이 알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랄까. 학교 현장의 역사교육은 피상적으로 흐르고, 중요하지 않다고 우긴 역사는 절대로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 무시로 일관한 교육, 피해자로 날조한 미디어, 미래지향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역사를 잊은 국민을 만들었다.
과거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런 사회에서 역사를 묻는다는 건 밥을 먹다 말고 날씨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큼 어색한 일이 된다. 심지어 전쟁 관련 전시나 위령행사조차 여름방학 체험 프로그램처럼 소비되는 경우도 있다. 평화도, 추모도, 심지어 침묵조차도 별것 아닌 일상화된 관성의 루틴처럼 굴러간다.
물론 일본 안에도 예외는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여전히 미군기지 문제와 전쟁의 트라우마를 연결짓는 목소리가 나온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평화기념관에선 원폭 피해자들의 참상이 전시되지만 그날의 원인이었던 침략전쟁은 종종 맥락 없이 생략된다. 일부 시민단체나 지방정부는 위령과 반성을 함께 말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도쿄의 중심부까지 닿지 못한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전후 일본의 진보 세력은 고령화로 영향력을 잃었다. 그 빈자리를 메운 사람들은 책임 회피의 달인들이다.
이는 과거사 문제를 넘어 일본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내는 거울이기도 하다. 사회가 스스로의 과거를 정직하게 직시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향한 설계도 역시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전후 일본이 그려온 평화국가의 이미지는 분명 찬란했지만 그 아래 감춰진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렇게 일본은 일흔아홉번의 8월을 흘려보냈다.
올해는 다를 수 있을까.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지난 4일 국회에서 "형식은 차치하더라도 기억의 풍화를 막고 전쟁을 두번 다시 일으키지 않기 위해 종전 80주년 메시지를 발신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세계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는 나 개인적으로도 강한 의지가 있으며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더욱 나은 메시지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할 기대까지는 무리겠지만 올해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 행사에서 '찐한 스킨십'을 건넨 이시바 총리가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그의 메시지가 과거의 책임을 회피하는 낡은 관성을 조금이라도 흔들어줄 수 있다면 일본의 8월은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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