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국경일마다 비는 게양대… 태극기 앞에선 '멈칫'

최승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8.31 15:40

수정 2025.08.31 19:52

유리 난간·원룸·수거함 장벽처럼 느껴져
"독점은 금물… '모두의 깃발'로 돌아가야"
[파이낸셜뉴스] "태극기를 보관하기도 힘들고 집에 게양대도 없습니다. 주변에서도 다는 집을 보기 어려워요."
서울 마포구 한 원룸에 사는 백모씨(35)가 태극기를 구비해두지 않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평일은 물론이고 국경일에도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가정이 많은 게 현실이다. 실제로 80주년을 맞은 지난 광복절에도 서울 서초·마포·강서 아파트 단지와 원룸 밀집 구역에서 태극기를 게양한 곳은 드물었다. 일부 시민들은 태극기가 정치적 도구로 변질돼 국기 게양이 꺼려진다고 밝히기도 했다.

(위) 지난달 1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주택가에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가 걸려있다. (아래) 지난달 15일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 공동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사진 =최승한 기자
(위) 지난달 1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주택가에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가 걸려있다. (아래) 지난달 15일 서울 서초구 한 아파트 공동 게양대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사진 =최승한 기자

31일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현행 '국기법'은 1년 기준으로 삼일절·광복절 등 총 7일간 태극기 태극기를 게양할 것을 권장한다. 다수 지자체는 국경일 전후로 도로에 가로기를 달고, 안내 문자와 현수막 등으로 홍보한다. 다만 이런 독려가 곧바로 가정의 개별 게양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게 현장 체감이다.

서울의 신축 아파트의 경우 유리 난간과 초고층화로 세대별 게양대 설치가 쉽지 않다. "강풍·추락 위험을 우려해 단지 입구 공동 게양대로 대체한다"는 게 마포구 한 아파트 관계자의 설명이다. 원룸·오피스텔은 애초에 게양대 자체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태극기 구입 방식도 걸림돌이다. 5000원이면 행정복지센터에서 태극기를 구매할 수 있지만 태극기 구매를 위해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하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진다. 올해부터 편의점 판매도 시작됐지만 수요가 낮아 다수 점포가 재고를 들여놓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게양 후 세탁·보관, 훼손 국기 폐기 방법 등 관리의 번거로움도 태극기가 가정에서 사라진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과 대규모 집회를 거치며 태극기가 특정 진영의 상징처럼 소비돼 일상에서의 태극기 이미지도 바뀌었다. 직장인 신모씨(28)는 "지하철에서 가방에 태극기를 꽂은 사람을 마주치면 거리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전문가는 태극기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일상적 사용이 위축됐다고 지적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태극기는 국민 모두의 상징인데 특정 집단이 전유하는 듯 비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태극기 부대’라는 표현이 이미지를 왜곡하고, 무엇보다 진영 갈등의 중심에 놓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생활문화의 변화와 주거 구조가 실천의 장벽을 높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집단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 분위기가 바뀌며 국가 의례의 생활성이 약해졌고, 고층 아파트·원룸 확산 같은 물리적 제약도 크다"며 "예전처럼 집집마다 달라는 요구는 지금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광복절 연휴 둘째 날인 16일 진보와 보수 단체들이 각각 도심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앞세워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 뉴스1
광복절 연휴 둘째 날인 16일 진보와 보수 단체들이 각각 도심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앞세워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 뉴스1
또 태극기를 '모두의 깃발'로 되돌리고 생활 문턱을 낮추는 행정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다수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집회에서 성조기나 일장기와 함께 흔드는 장면은 민족의식이 없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며 "진영을 가르지 않는 공동 사용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동훈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규제보다는 공동 현관·단지 1층 공동 게양대, 국경일 전후 한시적 무료 배포 등 누구나 쉽게 달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425_sama@fnnews.com 최승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