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내 구금시설에 7일간 구금된 한국인 근로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인권까지 무시당한 사실이 알려졌다.
몰래 적은 ‘구금일지’에 남긴 당시 상황
1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근로자 A씨가 작성한 '구금일지'에는 참혹했던 당시 구금시설 환경과 인권 침해 상황이 고스란히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합법적인 B1 비자(출장 등에 활용되는 단기 상용 비자)로 입국한 A씨는 두 달간 업무 미팅 및 교육을 위한 출장 중이었는데, 이번 단속에서 케이블타이에 손목이 묶인 채 체포됐다.
지난 4일 공장에 들이닥친 ICE 요원들은 서류에 대한 설명도, '미란다 원칙' 고지 없이 외국인 체포 영장(warrant arrest for alien) 작성을 요구했다. 고압적 분위기 탓에 한줄 한줄 영어를 해석해가며 서류를 작성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데다, 근로자들은 종이를 작성하면 풀려나는 줄 알고 빈 칸을 채워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요원들은 서류를 제출한 근로자들의 짐을 뺏기 시작했고, 심각한 분위기를 눈치챈 A씨는 짐 가방 사이에 있던 휴대전화를 몰래 켠 뒤 가족과 회사에 '연락이 안 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껐다. 9시간 넘게 대기하던 A씨는 손목에 케이블타이가 바짝 채워진 채 호송차에 탑승했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근로자들과 함께 72인실 임시 시설에서 구금 초반을 보냈다.
구금자들은 1번부터 5번까지 번호 붙여진 방을 옮겨 다녔다. 늘어선 이층 침대와 함께 공용으로 쓰는 변기 4개, 소변기 2개가 있었고 침대 매트에는 곰팡이가 펴있었다. A씨는 생필품 등을 지급받지 못한 채, 지인에게 빌린 수건을 덮고 추위 속에서 잠들어야 했다고 밝혔다. 이후에는 치약, 칫솔, 담요, 데오드란트 등이 제공된 것으로 알려졌다.
15일 MBC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구금 당시 상황을 전한 익명의 피해자는 “수감 시설에 들어갔을 때 비치해놓은 물통에 거미 시체가 떠 있었다. 씻어서 바꿔달라고 하자 간수 중 한 명이 ‘이거 마시면 너희 스파이더맨 되는 거 아니냐’고 농담했다”며 “체포 당시에는 조롱성 발언 등이 없었는데 감옥에 들어와서는 자기들 딴에 농담이라고 하는 내용들이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A씨의 경우 4일차에 입소 절차가 끝난 뒤 2인 1실 방을 배정받았으나, 관련 절차가 늦어진 경우에는 72인실에만 머문 사람도 있었다. A씨는 구금 4일차 서류 작성을 하던 때 몰래 종이와 펜을 챙겨 구금 일지를 적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사우스 코리아” 질문에 맞다 했더니 “노스 코리아”라며 웃어
A씨는 구금 3일 만에 ICE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무슨 일을 했느냐’는 질문에 업무 미팅 및 교육을 위한 출장을 왔다고 답변하자 별다른 질문이 없던 요원은 A씨에게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남한)인지를 물었다.
A씨가 맞는다고 답하자 직원들끼리 웃는 표정으로 대화하며 '노스 코리아'(North Korea·북한), '로켓맨'(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에 붙인 별명) 등을 언급했다. A씨는 일지에 "나를 가지고 농담·장난을 하는 것 같아 열 받았지만, 혹여나 서류에서 무엇인가 잘못될까 봐 참았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구금 4일차인 7일, A씨는 총영사관 및 외교부 직원 4명이 구금자들을 만나 "다들 집에 먼저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사인하라는 것에 무조건 사인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분쟁이 생기면 최소 4개월에서 수년간 구금 상태를 벗어날 수 없으며, 사인하면 강제 출국당해 비자는 취소되고 전세기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는 사실을 안내했다고 한다. A씨는 이날 정식 입소 절차를 밟고 죄수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5일차인 8일에도 외교부 직원들이 구금자들을 만났지만 별다른 정보 없이 대기가 이어졌다. A씨는 "나는 적법한 B-1 비자로 들어왔는데 왜 불법인지 대해 파악이 안 된 것 같아 화가 났다"며 "자발적 출국 서류에 사인한 후에 우리를 무조건 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느껴져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고 일지에 적었다.
언제 나갈지 말이 없고 예정보다 석방이 미뤄진 가운데 초조함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은 11일 새벽 1시께부터 애틀랜타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시설을 떠났다. 이후 외국인 14명을 포함한 330명의 근로자들은 대한항공 전세기 KE9036편을 타고 한국 시간으로 오후 3시 30분께 귀국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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