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허가한 기간통신사업자의 원초적 가치는 '신뢰'다. 통신망을 안정적으로 운영해 언제든 끊기지 않는 통신서비스를 제공하고, 고객 데이터를 지키는 것은 기간통신사업자의 의무다. 의무를 지킨다는 전제 아래 정부는 기간통신사업자들에게 시장을 내준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통신사업자들이 신뢰를 깨고 있다. 신용카드 결제망이 연결된 통신망이 불통돼 수십만 소상공인들이 장사를 망쳤다. 통신사의 핵심서버가 해커에게 공격을 당해 사용자의 중요 정보를 도난당했다며, 2000만 사용자를 대리점 앞에 서너시간 씩 줄 세웠다. 이번에는 원인조차 모른채 다른 사람이 내 휴대폰으로 소액결제를 이용해 금전적 피해까지 입었다.
사실 해커의 공격이나, 통신망 불통은 아무리 충실한 대책을 세워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큰 틀에서 기간통신사도 피해자라고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통신회사가 충실한 대책을 세워왔다고 믿을 수 없어서다. KT의 통신망 불통 때는 통신망 유지보수를 등한시했던 관례가 나왔다. 해커의 공격을 받은 SK텔레콤은 사용자의 개인정보를 정확히 암호화하지 않은 안일함이 드러났다. 소액결제 피해를 입힌 KT는 해킹 사실조차 쉬쉬하며 피해를 키웠다. 이쯤되면 통신회사들이 스스로 신뢰를 깨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지난 10여년간 통신회사들은 AI, 미디어,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같은 신사업 확장에 주력하면서 '탈(脫)통신' 기조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쯤에서 곰곰히 따져봤으면 한다. 한국의 기간통신사업자들이 '폐(廢)통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AI, 클라우드, 미디어 같은 폼나는 신사업에 돈과 인재를 몰아주면서 통신망 관리와 유지보수, 보안에 필요한 비용은 잔뜩 줄여놓은 것 아닌가. 통신회사조차 통신서비스 부서는 한직으로 내몰아 인재들이 남아나지 않도록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최근 잇따르고 있는 기간통신회사들의 사고는 통신서비스를 등한시한 결과물 아닌가 따져야 한다. 기간통신사업이라는 본업 없이 AI, 클라우드 같은 신사업은 키울 수 있는가도 따졌으면 한다.
정부도 통신산업 정책이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통신산업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차 안정적 통신서비스를 위한 구체적 정책목표와 실행 수단을 갖고 있는가. AI 같은 폼나는 신사업에 정책을 집중하고, 통신회사들의 투자를 신사업으로 종용하고 있지 않은가. 전국 기간망 관리상황은 점검이나 하는가. 개인정보 유출에 대해 거액 과징금 처벌로만 끝내려 하지 않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AI 3대 강국의 정책목표를 내세우면서 AI에 정책자원이 집중되고 있다. AI 산업에서 새 먹거리를 찾는 것 중요하다. 미래를 위해 신산업을 키우는 것은 절대과제다. 그런데 대통령의 정책과제를 실현하는 정부와 기업에 필요한 것은 속도의 경쟁 못지 않눈 균형의 감각 아닐까 싶다. 하루가 멀다하고 국민의 개인정보가 해커들의 먹잇감이 되고, 전국민의 손안에 있는 휴대폰이 금융사고의 시발점이 된다면 AI 강국이 무슨 소용인가 말이다. '세계 최고의 IT강국'을 자랑하던 한국이 국민의 신뢰를 잃고 신사업에서 성공하기를 바랄 수 없다. 통신사들과 주무부처가 신사업에 집중하느라 본업의 안정성을 등한시했다고 뒤늦게 반성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수년째 반복되는 사고들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지금 점검해야 한다. 본업부터 다시 챙겨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는 통신환경을 만드는게 기본이다.
cafe9@fnnews.com 이구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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