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 답사 나선 청년들 "오늘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광복 80주년 임시정부로] ① "모두가 백범"…中난징서 만난 광복군의 길중국 대륙 답사 나선 청년들 "오늘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 편집자 주 = 광복 80주년을 맞아 한국 청년들이 중국 대륙으로 향했다.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주최한 '국외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탐방'에 나선 청년 48명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지난 14일 난징을 출발해 충칭과 청두를 거쳐 한국광복군 활동의 핵심 거점인 시안까지 7박 8일간 약 2천㎞를 이동하며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흔적을 쫓았다. 연합뉴스는 탐방단의 일원으로 여정을 함께 했고, 그 과정을 세 편의 기사로 소개한다.]
(난징=연합뉴스) 한종구 기자 = 인천공항을 출발한 탐방단의 첫 목적지는 장쑤성 성도 난징.
임시정부의 공식 청사가 있는 곳은 아니지만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대였다.
국외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 탐방단이 첫 발걸음을 내디딘 곳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싸우다 숨진 중국 공군과 외국인 의용군을 기리기 위한 항일항공열사기념관이었다.
벽돌 담장을 따라 작은 언덕을 오르자 '항일항공열사기념비'라는 거대한 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념비를 둘러싸고 있는 추모비에는 중국인 870명, 미국인 2천여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사이에는 한국인 전상국, 김원영 선생의 이름도 선명했다.
탐방단원 노규선씨는 "역사를 전공했지만, 이곳에 한국인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귀국하면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많이 알리겠다"고 말했다.
순간 탐방단원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교과서에도, 역사책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름, 하지만 낯선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이들의 흔적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기념비 앞에서 난징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을 만났다.
"한국인이 이곳에 안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한 학생이 주저 없이 답했다.
"학교에서 배웠어요. 한국은 중국과 함께 일본에 대항해 싸웠습니다."
짧지만 분명한 대답이었다.
난징 도심의 국민당 총통부와 중앙반점도 탐방단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고풍스러운 건물 외벽에는 세월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난징 시기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의 집무실로 쓰였던 총통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자취를 남긴 곳이다.
1933년 김구 선생은 총통부 맞은편 중앙반점에 머물며 장제스와 회담을 준비했다.
중국어가 서툴러 필담으로 장제스와 의견을 나눴다는 일화는 백범일지를 통해 지금도 전해진다.
당시 만남은 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치로 이어졌고, 한인특별반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은 훗날 광복군의 중추로 성장했다.
중앙반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탐방단은 그날의 회담을 상상하듯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 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탐방 둘째 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본부가 있던 건물을 찾았다.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잔무 처리와 교포 보호 등을 위해 조직한 기구로, 1946년 5월 충칭에서 난징으로 옮겨왔다.
외형은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고, 건물 입구에는 '한국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이 살던 곳'이라는 난징시 인민정부의 표지석이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김구 선생의 실제 거주지는 이곳이 아니라 인근의 회청교 부근으로 추정한다.
탐방단을 이끈 홍소연 전 백범김구기념관 자료실장은 "백범의 호는 '백정'과 '범부'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천하고 평범한 보통사람이라는 뜻"이라며 "여기 모인 여러분 모두가 백범"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의 정신은 백성과 가까이 있는 것"이라며 "여러분 모두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순간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뜨거운 빛이 스쳤다.
이어 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거주지인 '교부영'을 찾아갔다.
김구 선생과 장제스의 회담으로 만들어진 한인특별반에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들이 함께 거주하던 곳이다.
현재는 빌라 단지로 변해 원형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탐방단은 건물 앞에 서서 당시를 떠올리려 애썼다.
한 현지 주민은 "1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지만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탐방단은 이 밖에도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터, 임정 요인 거주지 터, 1946년 5월 한국광복군 복원 선언이 이뤄진 강소반점 터 등도 방문했다.
독립열사들이 활동하던 이 지역은 '터'라는 이름처럼 터만 남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청년들은 지도와 자료를 손에 들고 눈앞 풍경을 과거와 겹쳐 보려 애썼다.
다만 김구 선생이 밀정들의 눈을 피해 신분을 속이고 고물상을 운영하던 회청교 부근은 8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도 소박한 마을 정취가 남아 있었다.
마작판과 장기판 앞에는 노인들이 모여 있었고, 길가에는 의자 하나를 놓고 8위안(약 1천600원)에 머리를 깎아주는 노천 이발사가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탐방단은 그 자리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며 조국 광복을 향한 선열들의 결의를 떠올렸다.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일상의 공간 속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 역사는 비로소 현재와 이어졌다.
중국 난징에서 마주한 선열들의 숨결은 그들에게 '오늘의 자유를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남겼다.
사라진 흔적 앞에서 상상을 통해 역사를 되살려내는 답사 여정은 과거를 기리는 의식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곧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향한 다짐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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