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장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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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의 만수(이병헌 분)는 오랜 경력의 '펄프맨'이다. 고졸 출신으로 제지회사에 취업한 후 공장에 다니면서 방통대 학사학위를 받고 특수제지 분야의 전문가가 됐다. 그는 예쁜 아내와 아들딸을 둔 가장이기도 하다. 가족과 넓은 정원이 딸린 이층집에서 대형 반려견도 함께 키우며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
만수의 행복은 이내 예상 밖 해고 통보로 깨지고 만다. 25년 몸 바쳐 일한 회사를 떠난 후 금세 재취업할 줄 알았지만, 어렵게 얻은 면접 기회마저 날린다. 설상가상으로 3억 원이라는 대출금 상환 압박 때문에 힘들게 장만한 집까지 팔아야 하는 벼랑 끝 상황에 이르자 결국 취업에 걸림돌이 되는 동종 업계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나선다. 구범모(이성민 분)와 고시조(차승원 분) 그리고 최선출(박희순 분)이 그의 타깃이 된다.
지난 24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열 두번째 장편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실직한 만수가 재취업을 위해 잔혹한 선택을 하기까지 과정을 따라간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 속 실업자가 된 중년 가장이 개인을 파괴해 가는 처절한 이야기이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를 풍자와 유머가 섞인 블랙 코미디로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제목과 같은 "어쩔 수가 없다"라는 체념의 대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무력해진 개인의 수동적 태도와 도덕성 상실에 대한 자기합리화도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그 중심에는 단연 원맨쇼급 열연을 보여준 이병헌이 있다. 이병헌이 아니었다면 이를 누가 해낼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매 장면 겹겹의 복합적인 감정선을 보여주는 탁월한 연기 재능을 펼친다. 그가 열연한 만수는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도덕성을 상실하는 인물이다. 쉽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란 점에서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킨 이병헌의 열연이 새삼 돋보인다. 이를 위해 이병헌은 만수가 처한 비극을 연속적인 '시리즈'로 보여주고자 했다며 감정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리려 했던 노력의 과정도 밝히기도 했다.
이병헌이 '어쩔수가없다'를 처음 접했을 당시 박찬욱 감독에게 "웃겨도 되냐"고 질문했던 일화 역시 주목받은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이 풀고자 했던 블랙코미디에 대한 배우의 남다른 해석력과 이해력이 실감됐던 일화였다. 이병헌은 살인을 앞둔 상황에서도 실직자로서 동질감을 느끼게 했던 구범모가 아내의 불륜에 충격을 받을까 걱정하는 만수로 웃음을 줬다. 또한 뱀에 물려 자신의 미행이 들킬 위험에 처했음에도 상처를 이아라에게 맡기는 만수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뛰어난 코미디 감각으로 살려내며 영화만의 웃기고 슬픈 정서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실직이라는 결코 웃을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끝내 웃게 만드는 아이러니는 감독과 배우가 보여준 시너지이기도 했다.
만수와 일체감을 보여줄 만큼, 극 중 상황에 몰입했던 배우로서 장면을 더욱 다채롭게 만든 아이디어와 애드리브 또한 주목받고 있다. '어쩔수가없다'의 시그니처이자 명장면으로 꼽히는 만수와 구범모 그리고 이아라(염혜란 분)의 이른바 '개싸움' 신 역시 배우의 아이디어로 더욱 풍성해진 명장면으로 꼽힌다. 염혜란 역시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병헌의 아이디어 제안으로 연기가 더욱 확장됐다고 밝히는가 하면, 뱀에 다리를 물렸던 신도 언급하며 "아주 작은 건데도 너무 재미있게 살려주셨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저의 모든 신을 마무리해 주셨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병헌은 비극적 현실과 코미디의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최근 취재진과의 인터뷰에서 "만수의 경우는 정말 처절한 상황이었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막막한 상황이었다"며 "그걸 헤쳐 나가기 위한 몸부림이 바깥에서 보기엔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도 있고 피식 웃음이 나올 수도 있는데 그 정도의 선만 지키자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코미디를 보여주려 하는 순간 그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도 사라질 것 같았다"며 "웃기려고 뭔가 보여주면 그 순간에 감정이 깨진다, '저 배우가 대놓고 웃기려고 했구나'를 관객들이 느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고도 짚었다.
후반부로 향해 갈수록 어딘가 허술했던 만수의 인간미는 점점 옅어지고, 더욱 대담하고 잔혹하게 경쟁자를 제거한 후 '문 제지'에 입사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생존을 명분 삼아 기꺼이 도덕성을 버리고 원하는 바를 이루지만, AI와 기계로 자동화된 공장에서 유일하게 홀로 남은 인간으로 대비를 이루는 결말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제는 인간이 아닌 기계에 밀려나 언제 다시 소모품처럼 버려질지 모르는, 인간과 기계 사이 위태로운 긴장감은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온다. 정작 파괴했어야 할 시스템과 구조를 전복하지 못하고 경쟁자들을 살육해 버린 대가는 인간의 또 다른 소외를 마주하게 한 셈이다.
이병헌은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데 성공하지만 공허함을 남기는 만수의 모습으로 깊은 여운을 더한다. 영화 오프닝에서 행복이 충만했던 만수의 모습과는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상실감 가득한 엔딩이 더욱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한 이병헌의 해석도 흥미롭다. 그는 인터뷰 당시 "만수가 다시 출근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영화의 시작 지점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며 "영혼은 다 무너져 내리고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세 사람을 죽이면서 자신의 영혼도 망쳤고 가족 또한 영혼이 모두 엉망진창인 상태가 된다"며 "영화 초반에 '다 이루었다'고 얘기하지만 끝에는 '다 잃었다'는 말로 느껴지는 엔딩이 된 것"이라는 설명 또한 완결감까지 준 배우의 열연을 다시 곱씹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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