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의 교도소. 한국인 주부 장미정씨가 마약운반 혐의로 756일을 지구 반대편 수용시설에서 보낸 뒤 가족들과 겨우 재회했다. 억울한 죄명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대응은 부실했다. 초기부터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수감 이후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로 전말이 드러난 이후에야 정부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
20여년이 지난 현재 캄보디아에서 중국인 범죄조직에 납치·감금됐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한국 청년들이 현지 우리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문전박대당했다는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아직 근무시간이 되지 않았다"며 안전지역 입장을 거부하거나 "금요일 퇴근시간"이라는 이유로 전화를 끊었다는 내용이다. 국내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청년들의 가족 전화에 확인도 없이 "아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며 호소를 외면했다.
믿었던 국가에 사실상 배신을 당하자, 자포자기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오히려 범죄조직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살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조직들은 국가라는 '뒷배경'이 없는 우리 청년들을 더욱 조이기 쉬웠을 법하다. 범죄조직들은 친구, 친척들을 포섭하면 풀어주겠다며 더욱 대담하게 범행 대상을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그사이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외교부에 따르면 캄보디아에 입국했다가 연락두절 또는 감금됐다는 신고가 들어온 한국인 숫자는 2022년 1명에 불과했다가 2023년 17명에서 2024년 220명으로 급증했다. 올해 8월엔 330명까지 늘었다. 여건이 되지 않아 신고할 여유조차 없는 사례를 포함하면 수치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캄보디아에서 한국인이 실종되고, 감금되며, 매 맞는 일도 언론 보도로 뒤늦게 수면 위에 드러났다. 경북 출신 대학생 사망사건을 가족 제보와 탈출자 증언 등을 바탕으로 언론이 기사화했고, 정치권이 국회로 끌어올렸다. 이미 수백건의 납치·감금 신고가 접수된 다음이었다. 정부는 그 이후,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캄보디아로 날아가고 현지에 코리안데스크를 설치하겠다는 등 부랴부랴 관련 대책을 줄줄이 내놨다.
캄보디아 정부가 비협조적인 것은 인정한다. 인력이 부족하다는 항변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필요했던 것은 대규모 인력과 외교력이 필요한 전략·전술이 아니라 최소한의 안전 확보를 위한 도움이었다. 현지 공관이 구조요청 전화를 외면하지 않았다면 청년들이 국기를 등지고 거리에서 쫓기듯 도망치지 않아도 됐을 수 있다. 따라서 "퇴근시간"이라는 말 자체에 '알고도 손을 놓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현지와 협조가 어렵다"는 변명도 '그래서 시도하지 않았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외교관과 경찰이 무능한 건 아니다. 현장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시스템이 그들의 노력을 막는다. 책임을 지지 않는 문화, 위만 바라보는 보고체계, 잘못을 감싸는 조직 분위기. 이러한 점들이 결국 비극을 되풀이하게 한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이제라도 납치·감금된 국민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정부는 가진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 경찰은 범죄에 가담한 인물들이 있다면, 국내 입국을 거부하더라도 전원 송환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검찰은 가능한 한 모든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고, 법원은 최고 수준의 형량으로 추가 범행을 차단하는 등 국민의 법감정에 응답할 필요가 있다. 법과 제도가 국민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존재 이유조차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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