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하반기 연극무대는 고전의 프로그래밍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몇몇은 연작, 즉 시리즈의 기획이기도 하다. 국립극단의 '안트로폴리스Ⅰ프롤로그/디오니소스'와 LG아트센터, 양손프로젝트의 '유령들'이 대표적이다. 전자는 독일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가 그리스 비극을 '안트로폴리스 5부작'으로 창작한 작품 중 첫 작품이며, 후자는 현대의 고전 작가 입센의 3부작 계획 중 첫 작품이다.
최근 연극 지형에서 고전의 기획은 안전하며 보수적인 선택으로 다가온다. 연극무대에서 고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된 작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전은 오랜 시간 반복해서 재연되고 해석돼 온 작품이며, 그만큼 예술적 완성도가 검증된 작품들이자 관객들에게 어느 정도 익숙한 작품들이다.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 체홉, 입센 등은 한국연극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왔으며, 그만큼의 ‘경험의 역사’가 촘촘하게 쌓여 있다. 다만 이번의 '프롤로그/디오니소스'(윤한솔 연출)는 현대적 관점으로 다시 쓰인, 그리스 비극을 무대화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리스 비극은 연극예술의 근원이자 출발점이다. 무언가의 근원을 질문하며 파고드는 행위는 대부분 혼돈의 상황이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진단할 때 시작된다. 작가는 그리스 비극을 재창작한 이 작품이 2024년 종료된 팬데믹 기간에 쓰였음을 밝힌다. 연극예술의 원형을 담고 있는 그리스 비극을 경유해 인간 문명과 산업화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성찰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에서 1막 '프롤로그'는 인간존재가 땅에 정착해 살고 사건을 겪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방대하게 펼쳐진다. 무대는 이야기의 서사성을 강조하듯 분장실로 꾸며진 곳에서 움직임 없이 일련의 단어들이 내뱉어지고 작은 상황들이 평평하게 제시된다. 2막 '디오니소스'는 자극적인 요소들로 1막과 대비되도록 연출돼 있다. 레게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한 젊은 여성들이 에너지 넘치며 그루브 한 춤과 노래를 보여주며,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 역할을 한다. 이 여성들이 섬기는 신 디오니소스도 팝스타 같은 외모다. 원작의 시공간적 배경과 다소 겉돌 수 있는 현대적 요소들을 잘 봉합시키고 있는 점이 연출적으로 노련하게 다가온다. 라이브 캠(Live Cam)도 마찬가지다. 현장성을 키우는 라이브 캠은 최근의 다른 연극 무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장면 안의 맥락으로 수렴돼 긴장감과 몰입력을 위한 기술로 쓰인다. 배우들의 앙상블과 조율된 힘이 돋보인다.
'프롤로그/디오니소스'는 야성으로 뒤덮이며 끝난다. 테베 도시의 왕 펜테우스는 인간의 이성을 수호하며, 문명의 대표자인 양 디오니소스에게 도전하지만 패배한다. 디오니소스에게서 비롯된 광기는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염병처럼, 테베 도시의 모두를 물들여가며 퍼져갔다. 무대 안 남성들은 스타킹과 어린이 속옷 등을 복장 도착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동물에게 젖을 물리는 한편 자신의 아들을 동물인 듯 사냥한다. 혼돈과 무질서 속의 폭력과 고통은 어떻게 성찰과 연결되는가, 공연은 이를 질문한다.
엄현희 연극평론가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