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의 대화가 갑작스럽게 전개된다면, 한국은 '핵보유국' 북한과 미국의 담판을 지켜보면서 '남북 두 국가' 기조로 인해 북한과의 접점은 마련하지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가 27일 제기된다.
트럼프, 北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사라지는 비핵화
지난 9월 22일,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총비서가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하면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김 총비서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나름의 대화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됐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이미 재집권 전부터 북한을 '뉴클리어 파워'(nuclear power)로 지칭하며,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해 왔다는 점에서, 김 총비서가 미국의 더 전향적인 입장을 끌어내기 위해 포석을 둔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4일(현지시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마지막 일정으로 하는 아시아 순방에 나서며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 북한은 일종의 핵보유국(sort of nuclear power)"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김 총비서가 원하는 이야기를 할 준비가 돼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핵보유국'(nuclear weapon state)과는 다른 단어를 구사하고 있지만, 북한의 입장에선 미국이 자신들을 어떤 표현으로든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검토하기 충분한 환경일 수 있다는 계산을 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러시아로부터 핵 보유를 공공연하게 인정받고 있다는 외교적 자신감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입장에선 큰 부담이 된다. 북한의 비핵화가 북핵 정책의 최종 목표라는 정부의 구상과, 대화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입장이 마치 '동상이몽'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말 유엔총회 연설에서 정부의 공식 대북 구상인 'E(Exchange, 교류)·N(Normalization, 관계 정상화)·D(Denuclearization, 비핵화) 이니셔티브'를 제시하며 'D' 단계인 비핵화에 대해서는 '중단-축소-비핵화'라는 3단계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의 정치적 합의 또는 북한의 변심에 따라 핵 협상이 중단 혹은 축소, 즉 군축 단계에서 멈출 경우 정부의 구상이 임기 내에 실현되는 것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대신 미·중·러라는 강국들에 의해 핵 보유를 공식 인정받은 북한을 상대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맞게 된다.
美가 '한국도 당사자' 확언해야…전문가 "한미동맹, 더 세심한 관리 필요"
더 큰 문제는 북미 대화에 한국이 아예 영향력을 미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APEC을 계기로 북미가 판문점에서 만나기를 희망하는 것은 한국일 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북미 모두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이같은 '한국 패싱' 현상을 막기 위해선 '한국도 대화 당사자'라는 미국의 확언을 받아야 한다는 제언이 나오는 이유다. 북한이 남한을 '적대적 국가'로 대하며 대화 의지가 없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도움 없이 대화 테이블에 앉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장 이번 APEC 기간에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끝어내는 것이 북미 접촉보다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종원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 연구위원은 "북한이 남한과 대화하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한미 간 관세 협상 등 복잡한 이슈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북미 대화에 속도 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면서 "정부가 페이스메이커(pacemaker)를 자처한 만큼 지금은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오히려 북미 간 접촉점을 빨리 만들어 일단 대화를 성사하는 게 낫다고 보기도 한다. 정부가 북미 대화의 접점을 찾아 줄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대화 당사자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미 대화가 최대한 빨리 이뤄지는 게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약화하고 한반도 평화로 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면서 "그 과정에서 미국과 우리 정부 간 충분한 대화를 통해 우리 입장을 전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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