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랍스터'(2015)와 '킬링 디어'(2018)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9) '가여운 것들'(2024) 등을 연출한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신작 '부고니아'는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의 리메이크 영화다. '지구를 지켜라!'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비운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 장준환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병맛' 나는 B급 코미디와 예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전개 등으로 인해 당대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의 배급사였던 CJ ENM이 할리우드에서 이 영화의 리메이크를 추진해 탄생한 작품이다. CJ ENM은 영어 리메이크의 시나리오부터 감독, 배우, 제작사 패키징 등 기획개발을 주도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손에서 재탄생한 '부고니아'는 주인공들의 설정값에서부터 변화를 줘 원작과 차별화를 꾀했다. 원작에서 고압적이고 불쾌한 '꼰대' 재벌로 그려졌던 유제화학 강사장(백윤식 분)의 캐릭터는 성공한 거대 바이오 기업의 여성 CEO 미셸(엠마 스톤 분)으로 탈바꿈했다. 고지능에 젊고 유능한데다 무술을 수련해 격투에도 능한 미셸은 무척 미국적인 상류층이다.
그런 미셸을 납치하기로 마음먹는 물류센터 노동자 테디(제시 플레먼스 분)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벌이 사라지게 된 것부터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세상의 모든 불합리한 문제들이 외계인의 지구 침공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테디는, 자신이 외계인이라 판별한 CEO 미셸을 납치한 후 그를 통해 안드로메다의 함선에 타 담판을 지으려고 마음먹었다.
원작에서 병구(신하균 분)를 돕는 인물은 여자친구 순이(황정민 분)였으나, '부고니아'에서는 테디의 순진한 사촌 동생 돈(에이든 델비슨 분)이 함께 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의 성별이 바뀌면서 그에 따라 자잘한 설정도 바뀌었다. 예컨대 테디는 미셸의 성적인 접근을 막기 위해 돈과 자신에게 화학적인 거세를 한다.
얼핏 허술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도면밀하게 이뤄진 납치 계획은 성공한다. 테디는 지하실에 미셸을 가두고, 깨어난 그에게 안드로메다의 함선에 탈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외계인들이 지구를 종말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눈 깜짝할 새 머리를 깎이고, 항히스타민 연고로 온몸이 범벅이 된 채 의자에 묶인 미셸은 어두침침한 지하실을 '인류 저항군 본부'라고 부르고 있는 괴짜 테디와 돈을 어떻게든 설득해 탈출하고자 한다.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인 만큼, 원작과의 비교는 불가피하다. 원작에 비해 '부고니아'는 한층 간결한 플롯으로 구성됐다. 원작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세 개의 축 중 하나였던 형사들의 서사를 정리하고, 주인공인 미셸과 테디가 엎치락뒤치락 주고받는 공방전에 집중했다. 원작을 보는 재미 중 하나였던 자잘한 '병맛' 코미디나 한국적인 설정에서 나오는 전사 등도 간단하게 정리됐다. 'B급'의 느낌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원작 팬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90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는 웅장한 곡은 기이한 테디의 행적을 더욱 강조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간결해진 이야기 덕에 원작의 자잘한 디테일이 주는 재미들은 감소했지만, 두 주연 배우가 이뤄낸 불꽃 튀는 앙상블, (한국적인 느낌을 벗어나) 조금 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강조된 주제 의식과 그것이 남기는 짙은 잔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에마 스톤과 제시 플레먼스는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강렬한 연기 대결을 펼친다. 유려한 할리우드 스타일의 리메이크다. 상영 시간 1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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