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먹에서 色으로, 점에서 線으로 요동치는 삶 담아낸 힘찬 붓끝 [Weekend 문화]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0.31 04:00

수정 2025.10.31 04:00

'침묵을 일깨우는 정중동의 크로키 미학'展
산재로 팔 잃고 의수로 붓든 석창우 화백
아리수갤러리에서 내달 5일부터 개인전
수천개의 얽힌 점과선 생명의 리듬 표현
"예술은 영혼이 숨 쉬는 통로" 신념 담겨
먹에서 色으로, 점에서 線으로 요동치는 삶 담아낸 힘찬 붓끝 [Weekend 문화]
'47-8'
'47-8'
'46-12'
'46-12'
'47-6' 석창우 화백 제공
'47-6' 석창우 화백 제공

"침묵 속에서 움직임을 발견하게 하는 정중동의 미학입니다."

의수를 착용해 붓을 들고 생명의 순간을 그려온 석창우 화백(71·사진)의 제47회 개인전 '침묵을 일깨우는 정중동의 크로키 미학' 전이 오는 11월 5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아리수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석 화백의 예술적 여정과 신앙적 사유가 교차하는 대표작과 신작을 한자리에서 선보이는 것이다.

■몸이 그린 선, 믿음이 만든 리듬

지난 1984년 산업 현장에서 2만 볼트의 고압 전류에 감전돼 두 팔을 잃은 그는 절망 대신 붓을 택했다. 의수를 끼고 서예와 크로키를 결합한 독창적 화법 '석창우식 수묵 크로키'를 완성하며, 한국 미술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회화가 아닌, 삶의 흔적이자 기도다. 밥 먹는 시간조차 줄여가며 사군자와 전각, 글쓰기를 10년 넘게 반복한 끝에 붓은 몸의 일부가 됐다. 선(線)은 고통의 흔적이 아닌, 신앙의 호흡이자 생명의 맥박이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박사(예술나눔 공익재단 아이프칠드런 이사장)는 "석 화백의 선은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삶의 울림을 깨우는 기도'이며, 침묵 속에서 움직임을 발견하게 하는 정중동의 미학"이라고 평했다.

■신작과 회고전 '조우'…약함서 강함으로

이번 전시는 1층 전시장에서 미공개 신작, 지하 1층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 주요작을 전시한다. 신작은 순례 이후 새롭게 시도한 '색의 회화'로, 이탈리아 스펠로 꽃축제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먹빛과 색채가 교차하는 생명의 율동을 보여준다. 반면, 지하 전시 공간에는 지난 2023년 울산 고래재단에서 선보인 46회 개인전 작품들이 재구성돼, 작가의 예술 여정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석 화백은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결핍을 '강함의 증거'로 전환시켰다. 그는 기독교와 가톨릭 성경을 6년 7개월 동안 의수로 필사, 두 성경을 완독하며 '석창우체(書體)'를 완성했다.

그의 작품은 초·중·고 교과서 17종에 수록됐고, '석창우체'는 특허청 등록을 통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나눔 폰트로 확산 중이다. 현재 그는 (사)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으로, 장애예술인의 창작권 보호와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예술은 몸의 한계를 넘어 영혼이 자유롭게 숨 쉬는 통로"라는 그의 신념처럼, 석 화백의 그림은 예술의 치유와 신앙의 자유를 함께 품는다.

■정중동의 수묵, 색으로 확장된 신앙의 회화

그의 최근 작품들은 '먹의 명상'에서 '색의 찬양'으로 나아간다. 지난 2019년 유럽 순례길에서 만난 꽃과 군중의 장면, 코로나 시대의 바이러스 형상까지 그는 점과 선으로 생명의 리듬을 담았다. 그 수천개의 점들은 서로 얽히며 거대한 생명체의 호흡을 만들어내고, 화면 전체에 기도의 리듬을 새긴다.

김 평론가는 "석 화백의 붓끝은 더 이상 육체의 흔적이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을 잇는 영적 언어"라며 "그림이 곧 기도고, 침묵이 곧 찬양이 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고 부연했다.
석 화백은 2014 소치·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폐막식, 2024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청와대 오찬 행사 등에서 크로키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예술의 회복력과 인간 정신의 찬가를 증명했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10)는 성경 구절처럼 그의 예술은 고통을 은폐하지 않고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의 선은 세상과 하나님을 잇는 영혼의 다리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