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전국택배노동조합(민주노총 택배노조)가 오전 12시부터 5시까지의 심야배송을 제한하자는 제안이 촉발한 새벽배송 금지 논란은 민주노총 측이 "새벽배송을 전면 금지를 주장한 적 없다"고 해명하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택배기사들의 과로사를 막겠다는 취지의 제안이었지만, 현장의 택배 기사들이 가장 극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택배 기사 건강권 보호" VS "현장 모르고 생계 뒤흔든다"
지난달 22일 열린 '심야·휴일 배송 택배기사 과로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택배 사회적 대화기구)'의 제2차 회의에서 민주노총 택배노조는 "심야시간(0~5시) 배송을 제한하고, 주간연속 2교대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심야배송이 기사들의 과로사와 만성 건강 악화의 주된 원인이라며 “밤 시간 노동이 인간의 생체 리듬을 교란시켜 건강을 위협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택배노조의 이같은 제안은 새벽배송 폐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쿠팡 정규직 배송기사 노동조합(쿠팡노조)은 30일 입장문을 통해 "새벽배송은 국민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서비스로 자리 잡았고, 쿠팡 물류에는 생명과도 같은 핵심 경쟁력 중 하나"라며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단순히 '야간 근로를 줄이자'는 주장만으로 새벽배송을 금지하자는 것은 택배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쿠팡 위탁 택배기사 1만여명이 소속된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도 3일 성명을 통해 새벽배송 기사 2405명 중 93%가 새벽배송 금지에 반대한다고 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들이 야간배송을 선호하는 이유로는 △교통 혼잡이 적고 효율적(43%) △수입이 더 많음(29%) △주간 개인시간 확보(22%) 등이 꼽혔다.
CPA는 "오전 5시 이후 배송을 시작하면 출근·등교 시간대 교통 혼잡과 엘리베이터 사용 증가로 정상적인 배송이 불가능하다"면서 "새벽배송 금지는 야간기사 생계박탈 선언이자 택배산업의 자해행위"라고 비판했다.
야간 노동자들을 실어나르는 전세버스 업계도 강하게 반발했다. 안성관 전국전세버스생존권사수연합회(전생연) 위원장은 "택배 기사들을 안전하게 출·퇴근 시키는 전세버스 업계의 생존 기반까지 붕괴시키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생계 터전을 치워버리는 발상은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생연에 따르면, 쿠팡 야간 물류에 전세버스 1000여대가 운영되고 있다.
유통업계도 한목소리로 반대 입장을 냈다. 한국온라인쇼핑협회는 4일 공식 성명을 통해 "새벽배송 전면 제한이 소비자 생활 불편과 농어업인·소상공인 피해, 물류 종사자 일자리 감소 등 심각한 사회·경제적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유통학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새벽배송 산업은 약 6조8000억 원 규모의 시장으로, 여기에 38만 명의 중소상공인과 2만 1000여 농가 등 10만 3000개의 직접 일자리가 얽혀있다.
"쿠팡 저격 아니냐" vs "새벽배송 전면 금지하자고 말한 적 없다"
새벽배송 금지 논란에 점차 불이 붙으면서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이 쿠팡을 저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일부 커뮤니티와 유튜브 및 기사의 댓글창에서는 "쿠팡에게서 새벽배송을 빼앗아 알리·테무에 넘기려는 것", "새벽 시간대의 납치 및 인신매매 하려고" 등 근거 없는 주장들도 줄을 이었다.
논란이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 5일 민주노총은 공식 성명을 통해 "새벽배송 전면금지는 왜곡"이라며 "노조의 제안은 초심야시간 배송을 제한하고, 오전5시 출근조를 운영해 긴급한 새벽배송을 유지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노조가 요구하는 것은 배송 중단이 아니라, 죽음을 멈추자는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라고 설명했다.
이날 열린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 제2차 회의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새벽배 전면 금지를 요구한 단체는 없었다"고 밝혔다. 책임의원으로 조정을 이끌고 있는 김남근 민주당 의원은 "(새벽배송) 전면 금지가 아닌, 총량 근로 시간을 줄이거나 분리 작업을 따로 맡기는 등 과로사를 줄일 논의를 막 시작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생각해 볼 문제
택배기사들 사이에선 새벽이라는 '시간대' 보다는 '업무강도'의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자신을 현직 택배기사라고 밝힌 누리꾼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새벽배송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인원에 비해 과도한 물량으로 인해 기사가 과로하게 만드는 시스템이 문제"라며 "시간당 배송가구수를 제한하고 인원을 더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많은 택배기사들이 동의했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나온 일부 택배기사들의 "야간노동을 계속 하면 익숙해져 건강에 문제 없다"는 식의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대목동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김현주 교수는 3일 자신의 SNS에서 "논쟁이 소비자의 편리함이나 노동자의 선택이라는 프레임에만 갇히지 않고, 야간노동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야간노동이 몸에 익숙해진다'는 주장에 대해 "이는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라고 반박하며 "중요한 건 과학과 사실 위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택배 사회적 합의기구의 제3차 회의는 국토교통부가 택배업체들로부터 과로사 방지책을 전달받아 검토한 뒤 오는 28일 열릴 전망이다. 택배기사의 과로사 방지와 새벽배송 구조를 개선할 수 잇는 실질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디깅 digging'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땅을 파다 dig]에서 나온 말로, 요즘 은 깊이 파고들어 본질에 다가가려는 행위를 일컫는다고 합니다. [주말의 디깅]은 한가지 이슈를 깊게 파서 주말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sms@fnnews.com 성민서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