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달 말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국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고, 그 신세를 꼭 갚겠다"고 했다. 정 회장이 한미 관세협상 타결에 감사를 표한 지 보름 만인 16일, 이 대통령은 기업인 7명을 만나 8개의 부탁을 했다. 기업이 '신세' 갚는 방법을 대통령이 '부탁' 형태로 촘촘하게 제시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부탁 8개 중 5개는 보편타당하다. ①국내 투자를 늘려 달라 ②지방 산업에 관심 가져달라 ③대미투자를 잘 활용해 달라 ④규제완화를 위한 실질적 지적을 해 달라 ⑤고용안전망 강화에 참여해 달라. 기업이 원래 하던 일들이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들이다.
이번 관세협상으로 기업은 국가에 두 가지 신세를 졌다. 대미수출 관세가 25%에서 15%로 줄면 현대차·기아의 순이익은 3조원 넘게 늘어난다. 삼성, SK, 한화, HD현대그룹에도 추가 이익이 생긴다. 이 이익이 기업이 진 '직접적 신세'다. 관세인하의 반대급부로 대규모 달러가 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환율과 금리, 물가가 연쇄적으로 오를 수 있다. 이 부정적 파장은 기업이 지는 '간접적 신세'다.
기업은 국가 경쟁력을 높임으로써 신세를 갚을 수 있다. 실적을 더 올려 세금을 더 내고, 채용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지방 중소기업의 납품단가를 올리고, 산업 기반 확충에 투자할 수도 있다. 이왕의 대미투자를 성장의 기회로 삼고 규제 없는 넓은 운동장에서 힘껏 뛴다면 모두에게 '윈윈'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이 5가지 부탁은 흠잡을 데가 없고, 언론도 호평 일색이다.
반면 부탁인지, 지적인지, 희망인지 모호한 다른 3개는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⑥세금 깎아가며 사업해야 할 정도면 국제 경쟁력에 문제가 있는 거다 ⑦대기업에 인건비는 비중이 작을 것이므로 관용을 좀 발휘하라 ⑧후순위채권을 정부가 인수해 모험투자를 유도하겠다.
기업 입장에서 이는 '감세 요구를 자제하라' '임금 조정을 재고하라' '위험 부담이 큰 투자에도 나서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세금이나 인건비 줄인다고 기업 경쟁력이 즉각적으로 높아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부가 가격과 관련된 민감한 의사결정 사안에 '자제'를 요청하는 방식은 낯설다. 후순위채 발행은 기업에 평판 리스크를 초래하고, 이런 채권을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인수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이 세 가지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재정, 노동, 상생 모두 중요하다.
정작 우려되는 지점은 겉으로 드러난 부탁보다 그 이전 단계의 논의 과정이다. 한 연구기관 관계자는 정부 측 인사 S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정부의 외교적 노력 덕에 기업은 금전적 혜택을 본다. 이 과실을 기업이 독식하는 게 바람직한가. 과실의 일부를 정부에 기여하게 할 방법은 없을까?"
S의 문제의식에는 가계, 기업, 정부라는 세 경제 주체가 세 바퀴 자전거를 굴려 돈과 사람이 잘 돌게 하는 '시장'이 없다. 외교 성과물은 국가 시스템을 위한 공공재다. 어떤 기업이 혜택을 본다 해도 그 기업이 특별한 루트로 보상해서는 안 되며, 이익에 비례해 세금을 내고 일자리를 만들고 투자를 하면 된다. 그런 맥락에서 대통령의 부탁 ①~⑤는 합리적이고 ⑥~⑧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지만 못할 건 아니다.
그러나 S의 생각은 선을 넘는 것이다. 그 구상이 그대로 실현되기는 힘들 거라고 본다. 이미 포기됐거나 보편적 정책 형태로 순화되는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신세에 대한 별도의 기여'가 필요하다는 S의 근본적 인식이 유지되거나 누군가의 더 강한 의지가 작용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기업이 국가에 신세를 졌다면, 원래 하던 일을 성실히 수행하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신세를 거래 대상으로 삼는 순간 권력은 사유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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