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관세협상 합의 결과가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로 발표되며 대미 수출의 불확실성이 걷혔다. 그러나 수출시장 환경은 이전보다 훨씬 거칠고 척박해졌다. 상호관세와 자동차·부품 관세가 15%로 인하된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누리던 관세율 0%에 비하면 관세장벽은 현저히 높아졌다. 철강과 알루미늄 품목은 협상에서 제외돼 50%의 관세를 적용받는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유럽연합(EU), 대만 등에 막대한 금액의 대미투자를 요구한 것은 세계 무역의 질서를 바꾸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제 국가 간 교역에 공짜는 없다.
자유무역 시대에 성행한 수출 중심의 경제성장 모델은 종식을 고했다. 수출과 수입의 균형을 맞추려는 보호무역주의도 퇴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는 국가이기주의의 도래를 예고한다. 관세는 수입을 억제하는 방어장벽에서 투자를 압박하는 공격무기로 승격했다. 미국은 관세를 벌칙으로도 사용한다. 미국이 정한 투자대상에 한국이 45영업일 안에 투자하지 않으면 고율의 관세를 부과받는다는 벌칙이 협약서에 명시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외국인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보조금 지원이나 세제 혜택의 인센티브를 내건다. 이에 반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당근보다 채찍을 사용해 일방적 투자를 강요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대미 수출을 인질로 삼아 현금투자를 몸값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국우선주의가 확산하면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
수출기업에 해외 직접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조건이 되었다. 현지 시장에 투자하지 않으면 높은 관세를 부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의 투자에서 파생되는 사업에서도 소외된다. 미국의 조선업에 투자하는 1500억달러는 우리 기업의 몫으로 배정된다. 나머지 2000억달러의 투자에도 한국 기업이 참여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이런 기회를 포착하려면 현지에 투자해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 대기업들은 얼마든지 현지국이 요구하는 투자를 이행할 수 있다. 그러나 중소기업에 해외 직접투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업이다. 국내투자에 필요한 자금도 부족한 중소기업은 해외시장에 직접투자할 여력이 없다.
중소기업의 해외 직접투자에 대한 정부 지원도 전무하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해외에서 국내로 회귀하는 기업은 U턴 정책 덕분에 자금과 세제혜택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국내에서 해외로 나가는 기업을 지원해 주는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해외 직접투자를 자본과 일자리의 유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출지상주의 시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수출의 열매를 거두려면 직접투자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중소기업이 해외시장에 직접투자를 해야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단순한 상품 수출보다 직접투자가 우리 경제영토를 넓히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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