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포럼] '공론장'의 토대는 상호 이해와 합의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1.19 18:18

수정 2025.11.19 18:18

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

근래 독일 정치권에 '방화벽(Brandmauer)'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여 관심을 끈다. 이 용어는 포퓰리즘과 극우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극단적인 발언과 비정상적인 논리로 의회의 정상적인 토론을 방해한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과는 일체의 협력이나 연대를 차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류정당들이 의석수 기준 원내 제2당인 이 정당을 멀리하는 배경에는 독일 특유의 토론문화의 전통이 존재한다.

이미 고대 게르만 신화에는 우리의 화백제도와 유사한 '팅'이라는 명칭의 공개적인 토론기구가 등장한다. 사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공개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제도였다.

이런 흐름은 독일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졌다. 근대 초기 개인의 삶이 사적 영역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도, 독일 시민계급은 소모임에서 자율적으로 공적인 문제의 토론을 이어갔다. 예를 들면 작은 마을의 살롱이나 카페 혹은 독서클럽에서 독일 시민들은 사교모임만을 갖거나 단순히 사담만 주고받은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철학과 윤리에서 시작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국가 권력 등의 주제를 놓고 자유롭게 토론을 이어갔다. 근대사회를 이끌어간 계몽주의 문화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현재에도 독일 TV 방송에서 토크쇼와 같은 프로그램의 비중이 매우 높은 것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을 대표하는 하버마스가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발적인 정치 참여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토대를 '공론장(Offentlichkeit)'에서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렇게 토론과 대화는 독일 시민문화의 중심 원리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적 토대를 간직한 독일 의회에서 '방화벽'이라는 용어는 왜 만들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어느 사회인들 대립이 없을 수는 없다. 구태여 헤겔의 변증법 개념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대립은 변화와 발전을 위한 중요한 단계이니 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갈등과 대립이 포퓰리즘이라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긍정적인 기능을 억누를 때에는 문제가 된다. 독일의 중심적인 사회 현안인 이민, 난민, 정체성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AfD는 극우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치달았는데, 이것은 공론장의 역할을 가로막고 민주적 토론을 위협한다고 독일의 정치계는 판단했다. 그래서 이런 정당과는 협력하지 않겠다는 맥락에서 이 단어가 만들어졌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 행위이론(1981년)에서 공론장의 토대는 수단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합리성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합의를 통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19세기 후반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언론의 상업화, 그리고 민족주의 등을 통해 시민적 공론장이 일시적으로 왜곡되었지만, 인간 고유의 이성에 근거를 둔 토론과 합의에 의한 공공성의 원리를 존중할 때 민주주의 이상이 다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해 더 나은 세계로 발전해 간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이 철학자의 진단은 우리 사회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김길웅 성신여대 인문융합예술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