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아홉살 아이 하반신 마비됐는데 책임질 어른 없다"... '지연이 법' 생길까 [우리 아이 체육관, 믿을 수 있나③]

한승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01 07:00

수정 2025.12.01 07:23

[③.끝] "운전면허처럼 '안전 면허' 따야"...전문가 '안전 필증' 도입 촉구
합기도 체육관에서 훈련 중 하반신 마비가 된 지연(가명·9)이. 지연이는 기자와 인터뷰하는 내내 휠체어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사진=한승곤 기자
합기도 체육관에서 훈련 중 하반신 마비가 된 지연(가명·9)이. 지연이는 기자와 인터뷰하는 내내 휠체어에 앉아 시무룩한 표정을 보였다. 사진=한승곤 기자

지난 5월 충북 청주의 한 합기도 체육관에서 9세 여아가 훈련 도중 척수 손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사고 직후 초기 대응 미흡과 안전 관리 부실 논란이 제기됐으나, 체육관 측은 기저질환 가능성을 주장하며 책임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 본지는 사실상 안전사고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국내 체육 시설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문가 제언을 통해 제도적 개선점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파이낸셜뉴스] 태권도, 합기도장 등 아이들이 이용하는 체육관에 대한 해외의 엄격한 안전 기준과 달리, 국내 체육 시설 현장에는 여전히 관리에 대한 치명적인 허점이 드러나고 있다. 안전사고를 막을 수 있는 여러 제도가 부족하다 보니 이번 지연(가명)이의 사고 역시 단순한 불운이 아닌, 예고된 인재(人災)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5월 20일 충북 괴산군의 한 합기도 체육관에서 관장이 시킨 교육을 받다 척수 손상을 당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지연이의 어머니는 기자와 인터뷰 도중 "억장이 무너진다"며 가슴을 쳤다. 어머니는 "고난도 동작을 하는데 부모 동의 절차가 전혀 없었다"고 토로했다.

"아파도 참아라?"... 아이 잡는 '우격다짐' 지도

전문가들은 이번 사고의 근본 원인이 지도자의 전문성 부족과 아이들을 향한 강압적인 지도 방식에 있다고 진단했다. 아이들의 신체 발달 단계를 고려하지 않고, 성인에게나 적용할 법한 기술을 무리하게 주입하는 관행이 사고를 부른다는 것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 입장에서 이번 사건을 분석했다. 이 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태권도장을 비롯한 스포츠 시설에서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지도자가 운동 동작과 아이들의 신체 구조 간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다소 강압적으로 교육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신체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더 가라', '더 높이 뛰어라'고 강요하거나, 아이가 통증을 호소해도 '꾀병'이라며 윽박지르는 문화가 있을 수 있다"며 "특히 지도자와 수강생 간의 친밀한 관계(라포)가 형성되면, 아이들은 부상을 입어도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문 닫으면 밀실"... 학부모는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

더 큰 문제는 체육관의 폐쇄성이다. 대부분의 도장은 수업이 시작되면 문을 닫고, 학부모는 밖에서 기다리거나 차량 운행 시간에 맞춰 아이를 맡길 뿐이다. 도장 안에서 어떤 강압적인 지도가 이뤄지는지, 안전 수칙은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시할 방법이 전무하다.

"관장님을 믿는다"는 학부모의 신뢰는 역설적으로 아이들의 입을 막는 재갈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은 부당한 지시나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관장에게 저항하기 어렵다. 이번 사고 역시 밀실에서 벌어진 '그들만의 교육'이 빚어낸 비극일 수 있다.

"책임질 어른 없는 현실 원통해"... 어머니의 호소

이와 관련해 어머니는 앞서 기자회견을 열고 체육 시설 안전 관리 미흡에 대해 지적했다. 그는 "현재 수사기관에서 조사 중이라 특정인의 고의나 과실을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면서도 "어린아이가 피해자임은 분명한데, 정작 책임질 어른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단순한 비난을 넘어, 어머니는 시스템의 부재를 꼬집었다. 그는 "이번 사고로 어린이 체육시설의 안전 관리와 응급 구조 시스템, 지도자 자격 기준이 얼마나 허술한지 드러났다"며 "지도자는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하며, 보조 기구 사용과 사고 대처 매뉴얼 등 기초적인 안전 기준이 제도적으로 보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들이 안전을 꿈꾸는 곳에서 안전이 최우선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제 아이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체육 현장의 안전 시스템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피해 아동 어머니가 매일 기록하고 있는 치료 관련 기록들. 사진=한승곤 기자
피해 아동 어머니가 매일 기록하고 있는 치료 관련 기록들. 사진=한승곤 기자
운전면허 같은 '안전 필증' 도입 시급

전문가들은 사고 예방을 위한 구체적인 해법으로 '실전형 안전 교육' 의무화와 '안전 필증'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이 교수는 "단순 이론이 아닌 실제 사고 사례를 시각적으로 인지시키는 교육을 연 2회 이상 의무화해야 한다"며 "운전면허가 없으면 운전을 할 수 없듯, 안전 교육을 이수하지 않은 지도자는 체육관에 설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문화체육관광부나 관련 협회 주관으로 '안전 필증'을 발급하고, 학부모가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게시를 의무화하는 등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전문가들의 제언처럼 '안전 필증' 도입과 같은 실질적인 제도 개선, 그리고 피해자 구제책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합기도장에서 하반신 마비를 당한 제2의 지연이가 나오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9살 소녀의 눈물에 응답해야 할 때다.

지난 20일 지연(가명·9)이가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복귀하고 있다. 사진=한승곤 기자
지난 20일 지연(가명·9)이가 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병원으로 복귀하고 있다. 사진=한승곤 기자


hsg@fnnews.com 한승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