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찾아온 ‘전환의 시대’ ①회사 밖 현실
체면보다 ‘새로운 기술’이 가족에게 밥 먹여줘
나이에 덜 민감한 '제2의 노동능력' 만들어야
체면보다 ‘새로운 기술’이 가족에게 밥 먹여줘
나이에 덜 민감한 '제2의 노동능력' 만들어야
[파이낸셜뉴스]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 끝났다. 흥행과 화제성을 모두 잡았지만, 정작 김부장 또래인 50대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기 힘들었다는 말이 나온다. “너무 현실 같아서 보기 힘들다”는 반응이 주변에서 여럿 들렸다.
회사 복귀도, 임원 승진도 아닌 결말. 25년을 바친 회사를 떠나 세차장에서 다시 시작하는 김부장. 이 장면이 안타깝지만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50대가 마주한 가장 큰 질문이 '퇴직 후 어떻게 벌어서 살아야 하지'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왜 하필 세차장이냐'고 말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의 50대가 실제로 마주한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장면”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최근 만난 강정호(56·가명)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기업 홍보 부장, 중견기업 총무담당 상무를 마치고 2년 전 회사를 떠나 지난 8월부터 택시를 모는 강씨는 “현실을 잘 반영한 것 같다. ‘내려놓기’가 정말 힘들더라. 그러나 갈 곳이 많지 않았고 현실적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에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는 ‘50대의 전환’을 두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이번 편은 회사 밖에서 마주하는 현실을, 다음 편은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생존 전략을 전한다.
50대의 진짜 위기: 소득보다 ‘정체성’이 먼저 흔들린다
드라마 속 김부장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25년이나 버틴 건… 위대한 거야.”
실제 그에겐 ‘성공’의 상징들이 있었다. 한 번도 밀리지 않은 승진 기록, 서울에 마련한 아파트, 아들을 좋은 대학까지 보낸 자부심, 출장 때마다 사들인 고급 가방과 시계들.
이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는 꽤 잘 살아왔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그가 두려워한 것은 ‘퇴직’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퇴직과 함께 직급과 명함, 조직에서의 역할, 직원과 후배들, 매달 꽂히던 안정적인 월급, '나는 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강씨는 "50대에게 퇴직은 단순한 고용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나를 증명해주던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경험’으로 봐야한다"고 토로했다.
숫자가 보여주는 현실: 50세 퇴직, 20년은 더 일해야 한다
중장년의 ‘주된 직장’ 퇴직 연령은 평균 50세 전후다. 하나더넥스트 자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49.4세,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5월 발표한 자료에서는 52.9세로 나타났다. 가장 최근 수치를 기준으로 봐도 법적 정년과는 7년 이상 차이가 난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여러 연구에서 추정한 우리나라 실질 은퇴 연령은 70대 초반, 72세 안팎으로 나온다.
법적 정년은 60세, 국민연금 수령 시점은 65세지만 현실에서는 50세 전후에 회사를 떠나 70대 초반까지 일해야 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50대 초반에 회사를 나와도 앞으로 20년 이상은 더 일해야 한다. 국민연금이 나오기 전까지 10~15년의 공백을 스스로 메워야 하기 때문에, 50대의 재출발은 ‘자아실현’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생존의 문제가 된다.
회사 밖 첫 번째 현실: “소득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중·장년층이 주된 일자리를 떠나 재취업할 경우 임금은 대략 이전의 50~60% 수준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 5월 4050 중장년 구직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재취업 인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재취업 시 희망하는 최소한의 세전 연봉은 평균 4149만원이다. 이는 주된 직장에서 받던 연봉 대비 약 75%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정도를 원하고 있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이다.
또 서울시가 지난 9월 진행한 중장년 정책포럼 2025에 따르면 서울 중장년의 평균 희망 월급은 381만원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기업들이 중장년 구직자들에게 줄 수 있는 돈은 200만~300만원 미만이 가장 많았다.
문제는 50대의 고정지출이 여전히 무겁다는 점이다.
주택담보대출·전세대출, 건강보험료·각종 공과금, 자녀 교육비·취업 준비 비용, 부모 요양비·의료비, 기본 생활비 등. 이 연령대에서 소득 급락은 '조금 아끼면 되지' 수준이 아니라 가계 유지가 흔들리는 구조적 문제가 된다.
두 번째 현실: “갈 곳이 없다”
많은 50대는 자부심은 물론 자신감도 있다. “그래도 경력과 직책이 있는데, 비슷한 자리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각종 조사에서는 퇴직 후 재취업까지 평균 1년 안팎이 걸린다는 결과가 나온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4050 남성들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로는 휴식이 24.4%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계속된 실패라는 응답률이 23.2%로 뒤를 이었고 구직 정보가 찾기 어려워(18.1%)의 순이었다. 일을 하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한 이유가 41.3%에 달한 셈이다.
또 통계와 연구들을 보면, 50대 이후 상용직 비중은 줄고 임시·일용직, 단독 자영업, 단순 서비스·판매·노무직 비중은 뚜렷하게 늘어난다. 60세 이상 비정규직 근로자는 300만명을 넘어섰고, 전체 비정규직의 35% 이상을 차지한다.
회사 안에서의 ‘경력’과 ‘직급’은 회사 밖 재취업 시장에서는 예전만큼 힘을 쓰지 못한다.
김지연 KDI 박사는 "미국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 50대의 경력단절이 유독 심하다"라면서 "연차가 쌓이면서 임금이 올라가는 구조가 큰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이어 "이렇다보니 오히려 정년이 되기 전에 주된 일자리를 떠나는 직장인이 많다"면서 "같은 이유로 비슷한 업무를 할 수 있는 다른 직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구조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왜 김부장은 세차장으로 갔을까: 기술 기반 일자리는 아직 ‘문이 열려 있다’
현실에서 50대가 접근할 수 있는 일자리는 기존 커리어와 상관없는 분야가 많다. 하지만 나이에 덜 민감하고, 단기 교육으로 진입 가능한 기술 기반 직종은 분명히 존재한다.
자동차·기계 정비와 전기·설비·배관·냉난방, 건물·시설·조경 관리, 소방안전관리·안전 점검, 운전·배송·지게차 등 운반, 단순 기계 조작, 경량 기술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일자리들의 공통점은 기술·자격이 중요하고 나이에 덜 민감하다는 점이다. 또 짧게는 몇 달 교육으로도 진입이 가능하다.
한국고용정보원을 통해 자동차정비 관련 일자리를 잡은 조대호(57)씨는 “자동차·설비·에너지관리 같은 기술직은 50대 이후에도 충분히 진입이 가능한 분야”라며 “앞으로 10년, 20년을 버틸 수 있는 ‘제2의 노동 능력’을 만든다는 관점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부장이 세차장 일을 시작한 건 하향 이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전환 전략에 가깝다는 것이다.
어디서 무엇부터 다시 시작할까?
그렇다면 50대는 어디서,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막막한 질문이지만, 정책과 통계는 일정 부분 방향을 제시해준다. 고용노동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은 중장년층에게 현실적으로 진입 가능한 기술 기반 자격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들 기관이 2020~2024년 만 50세 이상 중장년 자격 취득자 51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격 취득 후 6개월 이내 취업률이 가장 높은 자격은 공조냉동기계기능사다. 취업률이 54.3%에 달했다. 이어 에너지관리기능사(53.8%), 산림기능사(52.6%) 등의 순이었다.
또 가장 큰 관심사인 월 보수액의 경우는 타워크레인운전기능사가 369만원으로 제일 높았고 천공기운전기능사(326만원) 등이 뒤를 이었다.
김부장은 실패자가 아니라, 중년의 새로운 ‘경제 모델’이다
드라마는 김부장을 실패자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체면보다 현실을 택했고 직급보다 기술을 택했고 명함보다 노동능력을 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지금 한국의 50대에게 가장 실용적인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현실의 50대는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
더 오래 일해야 하고 더 자주 전환해야 하고 더 다양한 직업을 거쳐야 한다. 김부장은 그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점퍼를 입은 김부장이 양복을 입은 김부장에게 말하는 대목이다. “김부장, 자존심 좀 내려놓자.” 그리고 "고생했다"라는 말이다.
알지만 자존심을 내려놓는 건 쉽지 않다. 아니, 정말 어렵다. 쌓아온 것을 포기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만큼 존재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한 번의 내려놓음이 앞으로 20년을 지탱해줄 수 있다면, 그건 굴욕이 아니라 전략이라는 게 경험자들의 공통된 말이다.
'은퇴=퇴장'이라는 낡은 공식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평균수명 83세 시대, X세대가 본격적인 은퇴를 맞이하면서 기존의 은퇴 개념 자체가 재정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2막' 이야기를 담은 [은퇴자 X의 설계]가 매주 토요일 아침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면 편하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kkskim@fnnews.com 김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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