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세대도 직업도 달랐지만…'계엄의 밤' 지새운 마음은 하나였다

연합뉴스

입력 2025.12.02 05:55

수정 2025.12.02 05:55

'서울의 봄' 경험한 故전태일 동생부터 20대 청년까지 국회 향해 "결연함과 두려움 뒤섞였지만…바로 옆 시민 보며 용기 얻었다"
세대도 직업도 달랐지만…'계엄의 밤' 지새운 마음은 하나였다
'서울의 봄' 경험한 故전태일 동생부터 20대 청년까지 국회 향해
"결연함과 두려움 뒤섞였지만…바로 옆 시민 보며 용기 얻었다"

세대도 직업도 달랐지만…'계엄의 밤' 지새운 마음은 하나였다 (출처=연합뉴스)
세대도 직업도 달랐지만…'계엄의 밤' 지새운 마음은 하나였다 (출처=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그날도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전태삼(75)씨는 황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며 43년 전 악몽 같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전태일의 동생'이라는, 때로는 멍에 같았던 운명을 짊어지고 형의 유지를 받들며 살아온 그였다. 전씨와 어머니 이소선(1929∼2011)은 전태일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지키려다 1981년 1월 계엄법 위반 혐의로 전두환 신군부에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구치소에서는 매일 '순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원산폭격과 목봉 체조 등 혹독한 얼차려가 가해졌다.

"너희 어머니도 오전에 머리를 박았다"는 교도관의 희롱에 무력감을 느끼며 이를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8일 12·3 비상계엄 1년을 앞두고 만난 전씨는 연합뉴스에 1960년 4·19혁명부터 자신이 경험한 '계엄의 기억'을 쉬지 않고 한동안 늘어놓았다.

전씨는 "계엄 선포 소식을 듣고 으스스 떨리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며 "(윤석열 전 대통령이)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른 것"이라고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 모임인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이기도 한 전씨는 사무실 벽면 빼곡히 진열된 영정사진 120여장이 머릿속에 스쳤다고도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불의한 정부에 맞서 생명을 바쳤던 사람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요. 매일 같이 땅을 파고 시신을 묻는 죽음의 행렬을 또 감당할 수 있겠어요?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계엄 선포 1시간여 뒤 도착한 국회의사당은 이미 대통령의 '봉쇄 명령'을 받은 경찰로 둘러싸여 있었다. 전씨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절대 계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국회를 지켜야 한다"고 외쳤다.

계엄 해제 시위에 참여한 문규식 씨(왼쪽) (출처=연합뉴스)
계엄 해제 시위에 참여한 문규식 씨(왼쪽) (출처=연합뉴스)

1987년 6월 항쟁 이듬해 대학에 입학한 문규식(56)씨도 망설임 끝에 국회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딸에게 애써 담담하게 "아빠 갔다 올게"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문씨도 학생운동을 하며 선배들에게 '전설'처럼 전해만 들었던 계엄이었다. '우리 딸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결연함과 '1980년 광주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가 뒤섞였다.

국회를 지키러 몰려가는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전씨와 문씨의 두려움을 가시게 했다.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고 앳된 목소리로 "계엄 철폐"를 외치는 젊은이들을 보며 이들 또한 힘을 냈다.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김경현(36)씨와 대학원생 김지수(25)씨는 역사책에서나 봤던 계엄이 부활했다는 소식에 황당함이 앞섰다고 떠올렸다.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귀가하던 경현씨는 '계엄이 진짜라면 정치인 몇 명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 방향을 틀었다.

여의도 하늘에서 군용 헬기가 내뿜는 굉음을 애써 무시한 채 앞서가는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보며 걷고 또 걸어 국회에 도착했다.

누군가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다 목소리가 쉬어버리자 뒷사람이 구호를 넘겨받았다. 곧이어 그 목소리에서마저 거친 쇳소리가 나자 다른 누군가가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대형 태극기가 인파 사이에서 펄럭였다.

지수씨의 기억 속 국회 앞 풍경은 질서정연하기보다는 피켓과 핫팩을 나눠주고 확성기로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뒤엉켜 다소 무질서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닌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실로 꿰여있는 모습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시위대 (출처=연합뉴스)
국회의사당에 모인 시위대 (출처=연합뉴스)

그렇게 시민은 국회를 지켰고 국회는 시민을 지켰다.

오전 1시 1분, 국회에서 계엄 해제안이 가결됐다는 소식에 전씨는 연신 "원식아, 큰일 했다"고 중얼거렸다. 전씨가 성동구치소에 수감될 당시 '옆방 동기'였던 우원식 국회의장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였다.

김지수씨는 "이전까지는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좋은 제도지만 절차적으로는 복잡해 오히려 정의 구현을 방해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감이 있었다"며 "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며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으면서 '이게 진짜 민주주의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씨는 계엄 해제 이틀 뒤 재심에서 어머니와 함께 뒤늦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기쁨의 함성 대신 '이런 것이 다 무슨 소용 있느냐'는 원통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첫 번째 탄핵안이 무산되기 전날이었다.

그러나 123일 동안 17차례 열린 집회에서 1천만개(주최 측 추산 연인원)의 응원봉은 춥고 깜깜한 밤을 밝혔고 마침내 윤 전 대통령의 파면을 끌어냈다.


한국 현대사의 고비를 헤쳐 온 전씨도 민주주의를 지켜낸 평범하고 위대한 시민들의 힘 앞에 매번 전율할 뿐이다.

"국회 앞에 모인 젊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모두 순수했어요. 저 사람들이 있는 한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있겠구나 싶었죠. 하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셨을 형님과 어머니도 '그깟 계엄 몇 번 와도 끄떡없다'면서 웃으셨겠죠."
계엄령 선포 후 국회 앞 (출처=연합뉴스)
계엄령 선포 후 국회 앞 (출처=연합뉴스)

away77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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