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최근 중국이 일본을 상대로 회색지대전략을 전격적으로 구사하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 지난 2025년 11월 다카이치 총리가 대만유사시 일본이 집단자위권 차원에서 개입할 수 있다고 시사한 것이 회색지대전략 본격 구사 결정의 배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인의 일본 여행에 제동이 걸리고 심지어는 일본 가수의 중국 상하이 공연이 느닷없이 중단되는 비상식적인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한령도 그랬듯이 중국이 정부차원에서 한일령을 지시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회색지대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방증이기도 하다. 기존 중국의 한한령 공식을 통해 유추해본다면 한일령은 상당히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한일령은 단지 중일 갈등으로 그치지 않고 동북아 긴장과 국제정치 교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의 한일령은 회색지대전략 특성상 일본 차원에서 대처가 어려울 뿐 아니라 중국이 부인하는 사안을 두고 다자무대에서 의제로 올리기도 어렵다. 사안에 대한 평가가 명확한 흑백지대전략과 달리 회색지대전략에 대한 대처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회색지대전략 고도화가 한국 입장에서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이번 기회에 회색지대전략이 가동되는 현 상황을 다시한번 따져보는 등 중간점검이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한한령과 한국방공식별구역 문제 외에도 중국은 서해 내해화 목표 달성 차원에서 2010년부터 회색지대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구조물 설치 수준까지로 고도화된 상태다. 나아가 중국의 일본에 대한 회색지대 강압은 단지 일본을 넘어 전 세계 국가에 경고하는 성격이 있다. 외부에서 대만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중국이 단호한 조치에 나설 테니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전략적 메시지도 녹아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대만 문제가 규칙기반질서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처리되도록 방치할 수도 없다는 지점에 딜레마가 있다. 한편 미국의 대만 유사 입장에 불명확한 가운데 이런 딜레마 기제가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도 숙고할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안보외교와 포용외교를 절충하는 투트랙 외교의 중요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안보·군사협력과 같은 상위정치(high politics)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안보외교는 말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 안보외교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는 지점을 찾아서 이익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는 비유사입장국과의 협력의 접점도 예리하게 찾아내는 포용외교도 필요하다. 포용외교에서 다루는 의제는 비군사 등 하위정치(low politics)에 기반하지만, 대화와 소통으로 긴장을 낮추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안보외교의 대표적 유형이 한미일 협력 플랫폼이고, 포용외교의 상징적 소다자 플랫폼은 한중일 정상회의다. 당장 중일 갈등으로 한중일 협력 플랫폼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있다. 한중일 협력 플랫폼의 기능 제 활성화는 동북아 긴장 완화뿐 아니라 신냉전 기제 완화에도 중요하다. 재활성화되고 있는 한중협력의 기제를 잘 활용하여 한국이 한중일 정상회의 교착도 해소한다면 선진강국외교 업그레이드로 선순환도 가능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포용외교 노력 속에서도 안보이익 차원에서 회색지대전략 상쇄 방책을 지속적으로 고도화한다면 안보외교와 포용외교의 절충지점을 잘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반길주,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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