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세계적 신예 감독, 미야케 쇼 연출
[파이낸셜뉴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연말 여행 계획이 마땅치 않다면, 배우 심은경 주연의 일본 영화 '여행과 나날'로 잠시 마음의 휴식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오는 10일 개봉하는 이 작품은 세계가 주목하는 신예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이다. 베를린·로카르노 등 유수 영화제가 주목한 그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감성의 감독’, ‘섬세한 관찰자’로 불린다. 이번 작품에서도 인물의 일상에 깊숙이 밀착하는 카메라워크와 여백이 살아 있는 구성 그리고 오감을 자극하는 영상미가 돋보인다. 영화는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1967)과 ‘혼야라동의 벤씨'(1968) 두 편을 독특한 액자식 구성으로 엮어냈다.
여름과 겨울,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두 남녀
슬럼프에 빠진 한국인 각본가 ‘이’(심은경)는 혼자 겨울 여행을 떠났다가 눈 덮인 산속에서 혼자 여관을 지키는 주인장 벤씨를 만난다.
여름 이야기는 넘실대는 푸른 파도, 폭풍 전야 숲 사이를 스치는 거친 바람, 두 남녀의 일상적 대화 속 묘한 긴장감을 담아내며 감각을 깨운다. 반면 겨울 이야기는 소복이 쌓이는 설경의 고요함 속에서, 두 남녀의 예상치 못한 달밤의 일탈이 웃음을 자아내다가도 그 이면의 씁쓸한 진실을 드러낸다.
쇼 감독은 2일 서울 용산구 CGV아이파크몰에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잠시 쉬어가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길 바란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극장이라는 공간에 애정을 표하며 "극장 속 어둠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두 개의 다른 이야기를 하나로 엮은 이유에 대해서는 “겨울 추위 속엔 여름이 그립고, 한여름 더위 속엔 겨울을 기다리게 된다”며 “한 편의 영화에서 여름과 겨울을 모두 맛본다면 분명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이번 작품에서 “바람을 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바람이 불기 전의 고요함부터 몰아치는 순간까지, 그 모든 변화를 스크린에 담고 싶었다”며 “극장 속 어둠이라면 눈과 귀뿐 아니라 피부로도 바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두 인물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심은경은 한국어 내레이션을 더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쇼 감독은 “원래는 일본인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었는데, 어느 순간 심은경 배우가 이 역할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며 “그가 일본어로 대화하다가도 가끔 한국어로 말하면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나는 느낌이 있어 두 언어를 모두 영화에 담았다”고 밝혔다. 이어 “말을 하지 않을 때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의 모습도 담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극 중 벤 씨는 이가 각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은 ‘유머 속에 인생의 슬픔이 배어 있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이를 놓고 영화에 대한 감독의 철학이 반영된 것인지 묻자, 쇼 감독은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다른 답을 내놓았다.
쇼 감독은 “영화를 보고 나면 감각이 아주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란다”며 “한 편의 영화가 이념을 완전히 뒤집지는 않더라도, 미세한 변화가 생기는 그 지점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이어 “영화 속 이의 대사처럼 말의 틀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고정관념에서 한 발 떨어져 보기를 바란다. 그런 과정이야말로 영화라는 여행이 건네는 진짜 여정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협업, 인생 풍요로워져"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과 풍경을 만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묘미다. 그러나 낯선 여정은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안기고, 나와는 다른 이방인을 마주하는 일 역시 예외가 아니다.
쇼 감독은 일본 사회 분위기를 언급하며 “불경기의 여파로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정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 역시 타자를 두려워하지만, 그 감정에 머무르면 인생이 단조로워진다”며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면서도 존중하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흥미롭다”고 했다. “배우의 연기 또한 카메라 앞에서 서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상대를 알아가며 새로운 공기를 만들어가는, 그런 만남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서로 다른 감정을 나누고 각자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부연했다.
영화 제목 '여행과 나날'에 대해서는 “비일상과 일상,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처럼 반대에 놓인 듯한 것들을 나란히 배치하고 싶었다”며 “대립이라기보다 서로 뒤섞여 있는 느낌을 지향했다”고 말했다. 이어 “여행은 집을 떠나 어딘가로 향하는 여정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도 하나의 여행일 수 있다”고 답했다.
'여행과 나날'은 한일 공동제작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인 배우가 주연을 맡은 국제적 협업 사례다.
쇼 감독은 요즘 늘고 있는 국제 공동제작에 대해 “경제적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들과 협업하며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점이 큰 의미”라고 평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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