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정부와 비무장지대(DMZ) 출입 허가권을 가진 유엔군사령부와의 입장 차이가 갈등으로 심화하는 모양새다. 유엔사가 정부 주요 인사 등의 DMZ 방문을 연속으로 불허하면서, 정부 내에서 "영토 주권을 유엔사에 뺏긴 것"이라는 볼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엔사는 "정전협정은 DMZ를 포함해 정전협정 관리 지역에 대한 민간·군사적 접근을 규율하는 구속력 있는 기본 틀"이라며 정전협정에 따른 권한을 적절하게 행사하는 것이라는 입장이지만, 정부가 DMZ를 '재개발'해 남북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것에 대한 불만과 DMZ 내에서 정치적 행동이 이뤄지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출입 허가를 거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4일 나오고 있다.
정동영 장관 "국가안보실 차장도 방문 불허"…공개적 불만 제기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전날인 3일 '비무장지대(DMZ)의 보전과 평화적 이용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입법공청회'에서 "유엔사는 얼마 전에도 국가안보실 1차장(김현종)이 백마고지 유해 발굴 현장에 가는 것을 불허했다"라고 밝혔다. 이는 대통령실이나 정부에서 밝히지 않았던 사안으로, 정 장관이 사실상 유엔사를 겨냥한 '폭로성' 발언을 한 셈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유엔사는 이에 대해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하진 않았으나 "유엔사는 정전협정의 집행 권한을 가진 기구로, 안전·규정 준수·지역 안정 보장을 위해 마련된 절차에 따라 모든 출입 요청을 검토 중"이라며 "정전협정은 DMZ를 포함한, 정전협정 관리 지역에 대한 민간·군사적 출입을 규율하는 구속력 있는 기본 틀"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DMZ 출입 문제는 정전협정 정신에 맞게 유엔사가 결정할 사안이며, 한국이 일방적 불만을 제기할 사안은 아니라는 취지로 읽힌다. 정전협정의 제1조7항에는 '군인·민간인 불문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가 없으면 MDL을 넘을 수 없다'고 명시돼 있으며, 제1조9항에는 '군인·민간인 누구든 민정·구호 업무 관련자나 군사정전위원회가 특정하게 허가한 자 외에는 DMZ에 들어갈 수 없다'고 돼 있다.
군사정전위원회는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군 장교 5명, 북한군·중국군 장교 5명으로 구성돼야 하지만, 1994년 북한과 중국이 위원회 대표단을 철수해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그 때문에 정부의 DMZ 출입을 유엔군사령부가 결정하는 상황이다.
DMZ 출입에 대한 정부와 유엔사의 마찰은 남북 대화에 적극적인 진보 색채의 정권 때 집중됐다. 김대중 정부 때인 지난 2002년 11월 남북은 DMZ 지뢰 제거 상태를 확인하고자 검증단의 상호 방문을 추진했으나, 유엔사가 군사분계선(MDL) 통과를 불허해 무산됐다.
지난 2018년 8월엔 유엔사가 남북 철도·도로 현대화 사업의 착공식을 위한 대북 물자 반입을 문제 삼아 DMZ 통과를 불허하면서 착공식이 계획보다 넉 달이나 지연됐다.
이에 앞서 같은 해 10월엔 김연철 당시 통일부 장관이 취재진과 함께 DMZ 내의 대성동 마을에 가려 했지만, 취재진의 출입이 불허된 경우도 있다.
올해 7월에도 바티칸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이 DMZ 방문을 신청했지만 유엔사는 "공동경비구역(JSA)접근 프로토콜과 맞지 않고, 신청 일자가 너무 임박했다"라는 이유로 불허했다.
정 장관은 전날 공청회에서 "이건 주권국가로서 체통이 말이 아닌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했다. 이는 특히 유엔사가 '영토'에 대한 주권 행사를 막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도 해석돼, 정부와 유엔사의 갈등이 심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왜 진보 정부와 마찰 잦을까…DMZ 보는 관점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 정부 관계자는 유엔사의 이같은 행보를 두고 "과거 남북 간 될 일도 유엔사 때문에 안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유엔사와 정부 간의 '불편한 기류'가 있는 것이 사실임을 시사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마찰이 DMZ를 보는 유엔사와 진보 정부의 근본적 관점 차이 때문으로 보고 있다.
진보 성향의 정권은 북한과의 대화를 대북정책의 기본으로 삼아 DMZ를 '평화의 상징'으로 교류협력 사업에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지난 1998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도 판문점을 통해 이뤄졌고, 문재인 정부도 판문점 정상회담 이후 'DMZ 평화지대화' 구상을 수립한 바 있다. 이재명 정부 역시 DMA를 포함한 접경지를 '평화경제특구'로 만들려는 구상을 수립 중이다.
반면 유엔사는 DMZ를 정전협정에 따른 '군사 완충지대'로 보고 있다. 그 때문에 출입·MDL 통과는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가 통제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 주도로 DMZ가 개발될 경우 유엔사의 존재 이유가 흐려진다는 점도 고려 대상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북한과도 소통해야 하는 유엔사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남북 간 합의에 따른 이벤트에 대해서는 유엔사가 기본적으로 수용한다는 기조지만, 남과 북 한 쪽의 정치적 행위만 허용할 경우 생길 수 있는 마찰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여당, DMZ 활용 입법 추진 박차…"정당한 권리" vs "갈등 심화 소지"
최근 정부와 여당에선 '평화 조치'를 위한 DMZ 출입은 정전협정의 규율 대상이 아니므로 유엔사가 허가권을 행사하는 것이 과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실제 관련 입법 추진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통일부는 지난 10월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국정감사 때 "DMZ 보전 및 평화적 이용 관련 법률 제정 지원 등 DMZ의 평화적 이용 사업 추진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평화적 이용을 위해 DMZ를 출입할 때는 통일부 장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전날 열린 공청회에서도 "DMZ는 우리 헌법상 영토조항에 따라 '영토 고권'은 우리나라에 있지만, 관할권을 군사정전위원회가 보유해 주권 행사가 일정 범위에서 제한되고 있다"(류지성 한국법제연구원 연구위원)라거나 "유엔사와의 협의를 통해 한국 정부가 DMZ 출입 문제를 비군사적 목적에 관해서는 '신고제'로 운영하는 방안을 협의해야 한다"(한모니까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등 유엔사의 '권한 축소'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이 '당연한 권리'라는 의견과 향후 유엔사와 정부의 갈등을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관련 입법 추진을 뒷받침하는 과정에서 유엔사와 적극 소통한다는 방침이지만, 일각에서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군사령관도 겸직하는 만큼, 자칫 이 문제가 한미 간 군사 갈등 사안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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