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조각이 된 쓰레기, 회화가 된 사진… 재창조의 미학 [Weekend 문화]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05 04:00

수정 2025.12.05 04:00

'타데우스 로팍 서울' 두개의 개인전
스페인 거장 호안 미로 '조각의 언어'
마요르카 섬에서 수집한 오브제 활용
하나로 합쳐 독창적인 청동조각 제작
한국 유망작가 정희민 '번민의 정원'
기술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주제로
디지털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겨와
정희민 작가의 '접히고 당겨져1' 미로 재단·타데우스 로팍 제공
정희민 작가의 '접히고 당겨져1' 미로 재단·타데우스 로팍 제공
타데우스 서울에서 열리는 호안 미로 전시 전경.
타데우스 서울에서 열리는 호안 미로 전시 전경.

갤러리에서 서로 다른 두 전시가 1·2층을 두고 열리고 있었다. 젊은 한국 작가와 현대미술사 거장이 하나의 공간에서 나란히 놓인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 보였다. 마치, 거장의 역사적 조형 언어가 오늘 갓 태어난 감각적 실험과 접점을 이루는 듯했다. 두 전시는 서로 다른 시대감·매체감·감각 구조를 비평의 장처럼 드러냈다. 국제적 유명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이 한국 작가의 신작을 거장 전시와 동등한 무대에 올렸다는 점도, 국내 작가의 글로벌 맥락 확장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접점이 없으면서도 있는 듯한 정희민의 개인전 '번민의 정원'과 호안 미로(1893~1983)의 '조각의 언어' 전시가 1·2층에서 동시에 선보인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두 전시를 내년 2월 7일까지 개최한다고 4일 밝혔다.

먼저, 1층에서 열리는 정 작가의 '번민의 정원'은 디지털 이미지와 물질적 표면이 중첩되는 동시대적 경험을 탐구한다. 그는 가상세계에서 수집한 이미지에 3D 프로세스와 자신만의 겔 미디움(gel medium) 기법을 결합해 다층적인 표면을 구축했다. 전시 제목인 '번민의 정원'은 스크린과 시뮬라크라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현대적 불안을 은유하며, 정 작가는 그 불안이 만들어낸 디지털 풍경을 회화적·조각적 언어로 재구성했다.

그의 대표작 '접히고 당겨져1(2025)'은 뒤엉킨 나뭇가지나 DNA의 나선구조를 연상시키며, 왜곡이나 변이, 돌연 변형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조각들은 자연계와 디지털 시스템 모두를 규정하는 질서와 엔트로피 사이의 긴장을 포착한다. 정 작가의 회화 속에서도 응결돼 나타나는 이러한 생물적 형태들은 디지털 왜곡의 과정을 통해 생성된다.

그는 디지털 이미지를 회화와 조각으로 변환하며 물질의 잠재성을 탐구한다. 정 작가는 기술이 어떻게 동시대적 지각 방식을 결정하며 또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추적하고, 더 나아가 그것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통해 작품에 질감과 부피를 더하며 매체의 질료성을 연구하는 그는 풍경화와 정물화를 비롯한 전통적 회화 장르를 그만의 시적, 시각적 은유가 내포된 작품으로 재해석한다. 이를 잘 대변하는 작품이 '구체들(2025)'이다.

정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정통회화 기법의 연장선상에 위치시키며, "회화는 긴 역사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보고 지각하는 방식의 변화를 감지하는데 용이한 매체고, 그래서 매력적인 매체"라고 강조했다.

정 작가는 대표작 '검은 잎의 시간(2025)'을 '풍경화'로 여긴다. 수공의 물질과 디지털 데이터가 축적됐지만 완전히 융합되지 않은 채 공존하는 이 표면은 유기적이면서도 인공적인 감각을 동시에 드러낸다. 합성 플라스틱이나 데이터의 표면, 더 나아가 신체나 지질학적 단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형적인 화면을 통해 그는 물질적 기원에서 분리된 채 가상 공간 속에서 평평하게 소비되는 이미지들에 다시금 물질적 자율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2층에서는 스페인 카탈루냐 출신 거장 호안 미로의 후기 조각을 소개하는 '조각의 언어' 전이 열린다. 1976년부터 1982년 사이 제작된 일련의 청동 조각들은 미로가 초현실주의적 아상블라주에서 출발한 실험적 조형 언어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마요르카에서 머무르던 시기, 지역의 수공예 전통과 해안의 생태적 풍경, 다양한 광물의 형태로부터 받은 영감이 그의 조형 실험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평범한 오브제들은 미로 특유의 상상력과 시적 결을 입고 재조합되며, 하나의 조각적 '별자리'처럼 자리잡는다. 전시장에는 어빙 펜(Irving Penn)이 1948년 촬영한 미로의 초상 사진도 함께 소개돼, 거장의 존재와 조각 세계가 맺는 관계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1930년대 초에는 초현실주의적 작품인 '구성(1930)'과 이후 '시적 오브제(1936)'를 통해 평면 회화에서 3차원적 조형으로 영역을 확장했는데, 이 작품에는 박제 앵무새 등 '발견된 오브제'가 포함돼 있으며, 미로의 독창적인 조형 감각이 서서히 구체화된 시기로 평가된다.

1944년 도예가 조셉 로렌스 아르티가스와의 협업을 시작한 미로는 1953년 이 관계를 다시 이어가며 본격적인 조각가로 도약했다. 1960년대 이후 조각은 미로 예술세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에 위치한 매그재단에 설치된 장소 특정적 작품 '미로의 미로(1964, 1968, 1973)'는 그 정점으로 꼽힌다.

갤러리 안쪽 벽면에 어빙펜이 1948년 촬영한 미로의 초상 사진 두 점 중 하나에서 미로는 스페인 타라고나에 있는 자택옥상에서 하늘 아래 자신의 조각들과 나란히 서 있다. 다른 사진에서는 미로가 유기적 형태의 청동조각들을 자신의 품에 안은채, 펜의 렌즈를 꿰뚫듯 응시한다.
사진에 담긴 작은 청동 조각들은 1940년대 미로의 손끝에서 직접 빚어진 원초적 볼륨감을 지닌 작품들로 그의 창의성과 인간적 따뜻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라티시아 카투아르 타데우스 로팍 시니어 디렉터는 "저희가 두 개의 개별적 개인전을 특별한 연결성을 염두에 두고 기획한 것은 아니나, 전시를 준비하면서 두 작가의 연결점을 조금 찾아볼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를 준비하고, 설치하면서 또 하나 굉장히 흥미롭고 흥분됐던 사실은 갤러리 1층에서 지금 전시하고 있는 정 작가와의 연결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호안 미로가 마요르카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그 주변에서 수집한 일상적인 재료들(옷걸이, 나무, 빵 조각, 등)을 발견된 오브제로 가지고 와서 자신의 조각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했다"면서 "정 작가의 경우에는 디지털 세계에서 발견되는 이미지들 혹은 도상들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조각이나 회화 등 작업 세계로 호출한다는 점에서 연결이 되고, 그런 교차 지점이 있어 이 전시를 준비하면서 굉장히 즐거웠다"고 전시 소감을 밝혔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