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재정·세제·금융 지원을 앞세워 주도권을 다투고 있고, 유럽과 일본도 주요 산업에 자금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기술의 중요도가 커지면서 '어디에 자금을 배분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반면 우리는 자금이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자산의 상당 부분이 부동산에 축적되면서 금융의 역할도 한정돼 있다.
이를 극복할 단서는 과거에 있다. 지난해 국제통화기금(IMF)의 'Industrialization and the Big Push' 보고서가 모범사례로 소개한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육성'은 국민투자기금과 정책금융을 통한 전략적 자금 배분으로 가능했다. 민간과 정부가 국가적으로 필요한 영역에 투자를 집중했고, 이는 산업기반과 성장동력이 됐다.
다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정부는 자금의 흐름을 전환하기 위한 생산적 금융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오늘날의 경제 규모와 구조는 과거와 다르기에 현실적 성공요건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첫째, 금융과 산업 간 상호 이해를 높여야 한다. 금융의 자금공급 시스템이 산업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생산적 금융은 선언으로 끝난다. 금융권 스스로 기존의 담보·보증, 재무실적 중심의 평가방식을 벗어나 기업의 기술력, 혁신 등 미래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돈의 중개자'가 아니라 '혁신의 동반자'가 된다.
둘째, 모험자본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하려면 공정한 거래질서와 투명성을 통해 시장 효율성을 확보해야 하고, 주주가치 존중 원칙이 확립돼야 한다. 투자자가 신뢰할 수 있는 시장 환경이 마련될 때 자본은 자연스럽게 성장성과 수익성이 높은 생산적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셋째, 생산적 금융의 성공은 결국 민간이 만든다. 재정은 마중물은 될 수 있지만 세금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규모·운용방식·의사결정 등에서 여러 제약이 있다. 민간은 수익에 따라 반복적인 투자가 가능하므로 동일한 1원을 투입할 때 '승수효과'가 더 크다. 따라서 민간이 적극적으로 생산적 금융에 나설 수 있도록 의사결정을 왜곡하는 규제를 줄이고, 세제 및 회계기준도 손질해야 한다.
넷째, 연금·보험·공제 등 장기자본의 생산적 분야 투자를 늘려야 한다. 유럽중앙은행(ECB) 전 총재 마리오 드라기도 '드라기 리포트'에서 유럽연합(EU)이 첨단 산업에 대한 장기투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연금자산을 통한 장기투자 확대를 제안했다. 우리도 장기자금이 미래 성장분야로 연결되도록 인식과 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이는 산업 경쟁력 강화와 노후자산 확충을 모두 달성하는 길이다.
새로운 성장에는 새로운 인식과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생산적 금융은 이를 제도화·시스템화해 산업과 금융 전반을 바꾸자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다음 20년은 지금 생산적 금융을 얼마나 과감하고 일관되게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