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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男과 결혼·이혼' 김지미 "난 마누라 필요"·"사랑하니 헤어져" 발언도 재주목

뉴스1

입력 2025.12.10 14:50

수정 2025.12.10 15:17

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 / 뉴스1
원로 영화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 / 뉴스1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60년대~70년대 은막의 스타, 원로 배우 김지미(본명 김지미)가 향년 8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가운데, 솔직한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던 고인의 생전 발언들도 재주목받고 있다.

10일 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김지미는 지난 9일(한국 시각) 미국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 절차 및 형식에 대해서는 논의 중이다. 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국내에서 영화인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940년생인 김지미는 1957년 '황혼열차'의 주연으로 영화계에 데뷔, 이듬해 '별아 내 가슴에'를 통해 스타가 됐다.

이후 '비오는 날의 오후3시'(1959) '바보온달과 평강공주'(1961) '장희빈'(1961) '혈맥'(1963) '이수일과 심순애'(1965) '토지'(1974) 등의 작품을 통해 60~70년대 최고의 배우로 이름을 떨쳤다.

1980년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김지미는 '비구니'(1984) '길소뜸'(1985) '티켓'(1986) 등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출연,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85년에는 '지미필름'을 창립해 '티켓'(1986)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불의 나라'(1989) '아낌없이 주련다'(1989) '물의 나라'(1989)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2016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평생을 화려한 스타로 살아온 고 김지미는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당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그는 개인사적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지미는 1958년 만 18세에 16세 연상의 영화 감독 홍성기와 결혼해 슬하의 자녀를 두로 살았지만, 1962년 이혼했다. 이어 김지미는 당대 인기 배우인 최무룡과의 스캔들로 '세기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 됐다. 1962년 유부남이었던 최무룡과 간통죄로 구속된 김지미는 1963년 최무룡의 이혼 후 그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딸을 두고 살았지만,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제작 실패로 1969년 이혼했다. 최무룡과 이혼을 발표할 당시 김지미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로 화제를 모았다.

1976년, 김지미는 또 한 번의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대 톱 가수인 7세 연하 가수 나훈아와의 열애였다. 두 사람은 혼인신고나 결혼식 없이 1976년부터 1982년까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 나훈아와 헤어진 후 김지미는 1991년 심장 질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네 번째로 결혼했지만 11년 만에 헤어졌다.
훗날 김지미가 이종구 박사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지미는 생전 거침없는 화법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는 과거 매체 인터뷰에서 "평생 매 맞을 각오하고 나의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고 말하거나 "나는 나 자신에게 충실하다, 나는 행동이나 말이나 거짓이 없다,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다, 참고 속이고 위선 떨고, 나는 그런 것을 못 한다"고 말하며 솔직한 성격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