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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한 속 '위대한 후퇴' 장진호 전투 종료 [김정한의 역사&오늘]

뉴스1

입력 2025.12.13 06:02

수정 2025.12.13 06:02

장진호 전투 (출처: Photo by Corporal Peter McDonald, USMC, 1950,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장진호 전투 (출처: Photo by Corporal Peter McDonald, USMC, 1950,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50년 12월 13일, 한국전쟁의 동부전선에서는 장진호 전투가 막을 내렸다. 미군 역사상 '가장 추운 전투'로 기억될 만큼 상상을 초월한 혹한 속에 벌어진 격전이었다.

이 전투는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약 2주간(11월 26일~12월 13일) 전개됐다. 유엔군, 특히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 소속 7개 사단의 포위와 파상공세를 뚫고 철수한 작전이었다.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극한의 기온은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함께 유엔군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겼다.



장진호 전투는 6·25 전쟁의 분수령 중 하나였다. 유엔군은 압록강 진격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으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돼 궤멸 위기에 놓였다. 이때 미 제1해병사단 올리버 스미스 사령관은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라며 포위망을 돌파해 해상 철수 거점인 흥남으로 향했다.

철수 과정에서 유엔군은 엄청난 인명 손실과 비전투 손실을 입었지만, 동시에 중공군에게도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중공군 제9병단은 병력의 절반에 가까운 5만 명 이상의 사상자(사망, 부상, 동상)를 기록하며 전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이로 인해 서부전선의 중공군 제13병단을 증원할 역량을 잃었다. 이는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진호 전투의 성공적인 철수는 이후 흥남 철수 작전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기반을 마련됐다.
전투 병력과 피난민 약 10만 명이 안전하게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에 인도주의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장진호 전투는 얼어붙은 영웅들의 귀환이었다.
전술적으로는 '위대한 후퇴'로 불리지만, 전략적으로는 중공군을 상대로 남진을 지연시키고 막대한 손실을 입혀 전쟁의 흐름을 바꾼 승리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