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무대의 희열만큼 치열했던 공부" '빌리 엘리어트' 그 소년, 애널리스트가 되다 [괜찮아, 다시 인생]

김희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21 07:00

수정 2025.12.21 09:11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1대 빌리 정진호씨 이야기]
탭댄스 하나로 160대1 경쟁률 뚫고 무대에 섰던 12살 소년
변성기 오자 무대에서 내려와 공부... 서울대 경영학과 진학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아시아 초연 무대에 올랐던 어린시절의 정진호씨. 탭댄스 하나로 1대 '빌리'가 된 그는 지금 홍콩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한발씩 내디딘 점들은 굵은 선이 되어 그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다. /파이낸셜뉴스DB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아시아 초연 무대에 올랐던 어린시절의 정진호씨. 탭댄스 하나로 1대 '빌리'가 된 그는 지금 홍콩에서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한발씩 내디딘 점들은 굵은 선이 되어 그의 인생을 그려가고 있다. /파이낸셜뉴스DB

숨 가쁘게 달려온 인생의 1막을 뒤로하고, 설렘 가득한 2막의 문을 연 사람들을 만납니다. 안정된 과거 대신 가슴 뛰는 불확실성을 택한 이들의 선택은 우리에게 '늦은 때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직업을 바꾸고 삶의 태도를 고쳐 쓰며 마침내 또 다른 나를 발견한 사람들. [괜찮아, 다시 인생]이 전하는 다채로운 삶의 궤적이 당신에게 새로운 영감이 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파이낸셜뉴스] 2010년 8월 13일, 한국 뮤지컬 역사에 잊을 수 없는 순간이 펼쳐졌습니다. 영국 웨스트엔드를 휩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아시아 초연 무대가 개막한 날이거든요. 당시 오디션에 참가한 800여명의 지원자 중 오직 다섯 명만이 1대 ‘빌리’로 선발돼 무대에 섰습니다.

그 중에는 발레를 한 번도 배워본 적 없지만, 오직 탭댄스 리듬 하나로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던 12살 소년 정진호가 있었죠.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소년은 더 이상 발레 슈즈를 신지 않습니다. 대신 말끔한 수트를 입고 홍콩의 마천루 숲으로 출근하죠. 화려한 조명 대신 숫자가 춤추는 모니터 앞에서, 관객의 박수 대신 냉철한 시장의 평가를 받으며 살아가는 투자은행(IB) 애널리스트 정진호씨(26)의 이야기입니다.

"춤추던 12살,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순간"

정씨의 어린 시절은 우연과 필연이 겹쳐 만들어진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어머니의 권유로 우연히 시작한 탭댄스에 푹 빠진 정씨는 2009년 예능 프로그램 <스타킹>에 ‘탭댄스 신동’으로 출연할 정도로 일찍부터 남다른 재능을 선보였습니다. 앉아서도 발을 구르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탭댄스를 추던 꼬마가 ‘아시아 최초 빌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게 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탄광촌에서 발레를 접하고 발레리노를 꿈꾸는 빌리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 영화에 기반한 영국 웨스트엔드 뮤지컬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2010년에 아시아 최초로 라이선스 공연을 올리며 ‘변성기를 맞지 않은 신장 150㎝ 이하 소년이라면 누구나’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한 거죠.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2010년 초연에서 공연 중인 정진호씨 /정진호 제공(매지스텔라)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2010년 초연에서 공연 중인 정진호씨 /정진호 제공(매지스텔라)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로 서기 위해서는 발레뿐만 아니라 탭댄스, 현대무용, 스트릿댄스, 아크로바틱, 보컬, 연기 등 다방면에서 높은 수준의 실력이 필요합니다. 이 때문에 아역 배우들에게 직접 춤을 지도하며 주인공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빌리 스쿨’을 통해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야 하고요. 바로 이 트레이닝 항목에 ‘탭댄스’가 있는 걸 본 정씨는 “탭댄스만큼은 자신 있었기 때문에” 운명처럼 도전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다방면으로 재능 있는 친구들이 800명이나 도전했어요. 오디션도 5차례나 봤고, 본격적인 리허설 기간에는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공연 연습을 하기도 했어요. 탭댄스 외에 다른 분야는 전혀 접해본 적이 없다 보니 어려움도 많았고요. 일단 발레를 잘하기 위해서는 유연성을 갖추는 게 기본인데 남들보다 유연성이 현저히 떨어지다보니, 매일 울면서 스트레칭을 했죠.”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정씨는 1대 빌리 5명 중 한 명으로 당당히 선발됐습니다. 그리고 2010년 8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약 70회가량 ‘빌리’로서 무대에 서서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았죠. 정씨는 “제 인생에서 가장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던 순간”이라고 그때의 기억을 돌이켰습니다.

무대에서 내려와 책상 앞으로

<빌리 엘리어트> 이후에도 정씨는 뮤지컬과 영화 촬영 등을 꾸준히 하면서 무대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찾아온 변성기가 많은 것을 바꿔놓았죠. 하루아침에 즐겨 부르던 노래가 나오지 않게 되자, 그는 진지하게 ‘다음’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릴 때 마트에서 ‘이 물건 값은 왜 이래요? 같은 물건인데 왜 마트와 일반 가게의 가격이 다르죠?’라고 묻던 저를 보고 누군가 ‘커서 경제학 박사 해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그때부터 진지하게 꿈으로 삼고 있었는데, 크면서 꿈을 더 구체화해서 ‘춤추는 경제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다 변성기를 겪으며 상경 계열에 대한 흥미와 공연 예술에 대한 관심을 한 번에 충족할 수 있는 예술경영인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는 과감히 무대에서 내려와 공부라는 새로운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외국어고등학교에 지원해 합격했죠. 그러나 춤추느라 놓친 공부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고, 첫 학기 성적표는 기대보다 초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 <빌리 엘리어트> 때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빌리’ 때처럼 노력하면 언젠가 된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남들보다 2~3배 더 노력해서 중학교 때 못 채운 공부량을 채우면 된다고 생각했죠. 졸업 직전 학기까지 꾸준히 성적을 올리면서 상승 곡선을 그렸고, 결국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군대 점호 후 문제집 펴던 청년, 홍콩으로 가다

대학 진학 후에도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술경영인을 꿈꿨지만 경영학의 넓은 세계를 접하며 금융 전문가로 목표를 수정한 정씨는 군 복무 중에도 점호가 끝나면 연등 시간과 주말을 쪼개 공인회계사(CPA) 시험을 준비했고, 전역 후에도 일주일에 60~70시간씩 투자하며 공부한 끝에 당당히 합격증을 거머쥐었습니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2022년 '열공모드'를 기록한 사진들 /정진호 제공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던 2022년 '열공모드'를 기록한 사진들 /정진호 제공

“회계사 합격 후에도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주식 투자 학술 동아리, 사모펀드(PE) 인턴 등 다양한 경험을 해보려고 노력했죠. 그 과정에서 M&A(인수합병) 자문 업무에 매력을 느꼈고, 결국 외국계 투자은행 인턴을 거쳐 올해 홍콩에서 애널리스트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현재 정씨는 한 외국계 투자은행의 홍콩 지사의 IBD(Investment Banking Division)에서 근무 중입니다. IBD는 기업의 M&A 거래에서 매수자, 매도자 측 의뢰를 받아 잠재적 매도/매수자 접촉, 기업 실사 및 가치 평가, 거래 종결까지의 일련의 과정과 IPO 등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는 과정에서도 자문하는 역할을 하죠. 정씨는 TMT, 헬스케어, 산업재 등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 업무에서 고객사와 논의에 필요한 자료를 만드는 등, 신입 애널리스트로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1대 빌리 정진호씨의 서울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모습 /정진호 제공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1대 빌리 정진호씨의 서울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모습 /정진호 제공

"인생의 점들은 결국 선으로 이어진다"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는 정씨지만, 당연하게도 가끔 무대가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함께 빌리를 연기했던 친구들이 배우로 활약하는 모습을 볼 때면 더욱 그랬죠. 그건 아마도 정씨의 마음 깊은 곳에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연기하고 관객들에게 박수를 받는 과정이 그 어떤 경험보다도 뜻깊고 행복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단언합니다. 과거 <빌리 엘리어트>를 공연했던 기억은 지금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커다란 동기 부여가 되어주고 있으니까요. 그때를 떠올리며 “빌리도 했었는데 다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정씨는 지금도 새로운 도전을 통해 경험을 쌓아가고 있죠.

“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the dots(점들의 연결)’라는 말을 좋아해요. 탭댄스를 배웠기에 빌리가 됐고, 빌리를 했기에 예술경영을 꿈꿨고, 경영학을 공부하다 회계를 접하고 지금의 제가 됐으니까요. 이렇게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다양한 경험들이 시간이 지나 결국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지금의 저를 완성해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홍콩에서 신입 애널리스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정씨의 일상 /정진호 제공
홍콩에서 신입 애널리스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정씨의 일상 /정진호 제공

지금 정씨는 홍콩의 치열한 금융 현장에서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신입 애널리스트로서 부족함도 느끼지만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패기도 갖췄죠. 12살의 그가 그랬듯, 노력하면 언젠가 빛을 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 미래는 결국 본인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인생의 선택지를 넓혀오는 과정이었다면, 본격적인 사회인이 된 만큼 이제는 제가 선택한 이 길에서 어떻게 하면 더 깊이를 더해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노력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소년 빌리의 비상은 끝난 게 아니라 무대를 바꿔 새로 시작하고 있었던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정진호의 인생' 2막은 한창 공연 중입니다.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