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피터 K. 볼이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중국 남동부 절강성 무주에서 전개된 사의 학을 추적한 연구서를 내놓았다. 이 책은 신유학·문학·박학·과거시험이 지역 사회에서 어떻게 얽히며 지성사와 사회사를 함께 형성했는지를 구체적 사례로 보여준다.
책은 중국 지성사의 중심을 조정과 수도에서 지역으로 옮겨 놓는다. 피터 볼은 무주라는 특정 공간에서 사들이 학을 실천하며 형성한 공동체와 갈등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는 학을 추상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읽고 쓰고 가르치며 정치·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가는 실천으로 정의한다.
첫 장은 남송 시기의 여조겸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과거시험과 서원, 스승과 제자의 관계 속에서 여조겸이 어떻게 사의 공동체를 만들었는지가 드러난다.
여조겸은 주희와 함께 근사록 편찬에 참여한 인물이지만, 저자는 여조겸을 단일한 신유학자로 환원하지 않는다. 전기 작가·학자·교사로서의 활동을 병치하며, 무주 지역에서 학이 다층적으로 실천됐음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학의 정치화가 다뤄진다. 과거시험을 위한 독서와 작문, 출판 활동이 무주에서 어떻게 전개됐는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논증적 글쓰기 형식과 책 쓰기는 학문 활동이자 사회적 경쟁의 수단이었다. 소식의 문학적 형식과 아이디어가 지역 사들에게 미친 영향 역시 중요한 사례로 등장한다.
세 편의 유서인 기찬연해·여지기승·군서고색을 다루는 장에서는 박학의 지향이 본격적으로 분석된다. 이 책들은 백과전서적 지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었다. 저자는 이러한 박학이 조정의 명령이 아니라 지역 사들의 필요와 열망에서 비롯됐음을 강조한다. 학은 곧 지역 사회를 조직하는 지적 도구였다.
도학을 다룬 장에서는 금화 사선생으로 불린 하기·왕백·김이상·허겸의 계보를 제시한다. 이들은 주자의 학을 유일한 올바른 앎의 방식으로 간주하며 학의 경계를 엄격히 설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문학·의학·경세학 등 다른 학문과의 긴장과 병존도 분명히 존재했다. 무주에서는 도학이 과거시험 중심의 학문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독자적 입지를 형성했다.
책의 중반부는 원의 정복 이후 무주 사들의 대응을 다룬다. 몽골인·중앙아시아인·북방 한인이 고위 관리로 파견된 상황에서 사들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고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학과 덕행, 문학 활동은 외래 지배 체제 속에서도 사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자원이 됐다.
후반부에서는 연대와 혈연, 족보와 단성촌을 통해 사의 사회적 기반을 분석한다. 중국 역사 인물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정량 분석은 무주 사들의 혼인과 학문 네트워크가 점차 지역 내부로 수렴했음을 보여준다. 학을 중심으로 한 연계는 혈연과 결합해 지역 정체성을 강화했다.
마지막 장은 명대의 부흥과 분열, 그리고 호응린을 통해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방향이 모색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호응린은 도학적 수양과 문학적 성취의 결합이라는 기존 전제를 거부하며 텍스트 연구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저자는 이를 신유학과 고증학이 병립하고 단절되는 지점으로 해석한다. 이 책은 무주의 사례를 통해 학문 문화가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지역적 전환이 어떻게 전국적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설명한다.
△ 피터 볼의 중국 지성사 강의 / 피터 K. 볼 지음 / 민병희 옮김 / 너머북스 / 3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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