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배터리 규제 파고와 우리의 생존 전략
유럽연합(EU)발 환경규제가 단순한 선언을 넘어 실질적인 ‘무역장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오는 2027년 2월부터 의무화되는 ‘배터리 패스포트(Battery Passport, DPP)’가 있다. EU는 탄소중립과 순환경제 실현을 위해 배터리 원재료 채굴부터 제조, 사용, 폐기 및 재활용에 이르는 전 생애주기(Life-cycle) 정보를 디지털화해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보 공개가 아니다. 유럽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일종의 ‘디지털 비자’이자 피할 수 없는 생존요건이 된 것이다.
EU 배터리 규제(EU Battery Regulation)의 핵심은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다. 과거에는 완제품의 성능만 입증하면 됐지만 이제는 이 배터리가 어떤 광물로 만들어졌고(공급망 실사), 탄소발자국은 얼마이며(환경성), 사용 중 성능 저하는 어떠했는지(잔존가치)를 투명하게 증명해야 한다. 특히 EU는 이 과정에서 데이터의 위변조 방지와 상호 운용성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특정 기업의 서버에 저장된 엑셀 파일이나 PDF 문서는 인정받기 어렵다.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공급망 내에서 데이터가 언제 생성되었고, 누구에 의해 검증됐는지가 투명하게 추적돼야 한다. 이것이 EU가 카테나-X(Catena-X) 등 데이터 스페이스를 통해 블록체인과 같은 분산원장 기술을 표준으로 채택하려는 이유다.
문제는 이러한 거대한 변화가 국내 배터리 생태계, 특히 중소·중견 기업들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쓰나미’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대기업은 자체적인 IT 인프라와 대응 조직을 갖출 여력이 있지만 수많은 2·3차 협력사들은 사정이 다르다.
중소 수출기업 입장에서 EU가 요구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가공하고, 이를 글로벌 표준에 맞춰 전송하는 시스템을 개별적으로 구축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비용도 문제지만 핵심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와 복잡한 보안 인증 절차는 기업들의 의지를 꺾는다. 만약 이들이 적기에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한국의 배터리 공급망 전체가 유럽 시장에서 배제될 위험성마저 존재한다. 따라서 개별 기업의 각개전투가 아닌, 산업계 공통의 대응 플랫폼 마련이 시급하다.
특히 이 사업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주관하는 ‘2025년 블록체인 공공분야 집중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남다르다. 이는 국가 차원의 전략적 지원과 부산시가 가진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라는 제도적 이점이 결합된 사례로 민간 전문 기업들과 함께 EU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한국형 표준 모델을 만들고 있다.
이 사업에는 배터리 생애주기 관리 전문기업인 피엠그로우(PMGROW)와 블록체인 기술 전문기업 파라메타(PARAMETA)가 주축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협력 모델이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배터리 산업의 도메인 지식과 블록체인 기술력이 결합하여 ‘규제 대응’과 ‘데이터 신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피엠그로우는 배터리 제조 이후의 사용 단계, 즉 전기차 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역량을 제공한다. 이는 EU가 요구하는 정적인 제조 데이터뿐만 아니라 동적인 운행 데이터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여기에 파라메타는 위변조가 불가능한 블록체인 기술을 입혀 데이터의 무결성을 보장한다. 특히 파라메타의 기술력은 데이터를 중앙에 집중시키지 않고도 검증할 수 있는 분산 신원인증(DID)과 영지식 증명 등을 활용해 기업의 민감 정보를 보호하면서도 규제 요건을 충족시킨다. 부산시의 사례는 단순히 지자체의 실증 사업을 넘어, 향후 대한민국 배터리 산업이 나아가야 할 ‘표준 대응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 EU 배터리 패스포트는 2027년 본격 시행되지만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이미 시작됐다. 지금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유럽과 중국은 자국 중심의 데이터 표준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제는 관망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다.
부산시와 피엠그로우, 파라메타가 구축하는 이 플랫폼이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국내 중소기업들은 과도한 비용 부담 없이 EU 규제라는 높은 파고를 넘을 수 있는 든든한 배를 얻게 될 것이다. 정부와 산업계는 이러한 선도 모델을 적극 지원하고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규제 대응을 넘어 글로벌 배터리 데이터 시장을 선점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투명한 데이터가 곧 경쟁력이 되는 시대, 준비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김기대 대구가톨릭대학교 창의융합대학장 겸 미래자동차공학과 교수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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