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정부 내 '자주파'와 '동맹파'의 노선 갈등이 결국 한미 간 대북정책 공조의 실질적 차질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통일부가 외교부 주도로 진행되는 한미의 대북정책 조율을 위한 정례협의(공조회의)에 불참하기로 하면서, 정부가 아직 대북정책에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부각됐다.
통일부는 15일 "외교부가 진행하는 미국 측과의 협의는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가 담긴 공동 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의 후속 협의"라며 정례협의에 불참하고 미국과 별도로 대북정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부 "대북정책, 美와 별도 협의"…외교부 주도의 '한미 공조회의' 격 깎아내려
통일부가 밝힌 입장문을 보면 현재 정부 내 자주파(남북 양자 중심의 한반도 문제 해결)와 동맹파(미국 등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한 한반도 문제 해결)의 갈등이 어느 정도인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통일부는 이번 한미 정례협의가 한미 당국 간 협의가 아닌 '외교부가 진행하는' 회의라며 "동맹국으로서 필요시 국방정책은 국방부가, 외교정책은 외교부가 미국과 협의하고 있으며 남북대화, 교류협력 등 대북정책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필요시 통일부가 별도로 미측과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통일부가 현재 미국과 '개별 협의' 일정을 조율하는 등의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미국과의 개별 협의는 앞으로 논의를 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모습은 미국에게도 좋지 못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전직 고위 당국자는 "미국은 당장 내일 있을 회의에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뭐냐'부터 캐물을 것"이라며 "정부의 대미 메시지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케빈 김 주한미국대사대리는 지난달 25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일치된 한국 정부의 입장'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7년 전 '한미 워킹그룹' 때의 '악연' 작용했나…"외교부, 남북관계 이해 못 해"
통일부가 외교부 주도의 한미 간 대북정책 협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문재인 정부 때인 지난 2018년 가동됐던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으로 보인다.
한미 워킹그룹은 지난 2018년 창설한 한미 간 별도의 협의체로, 외교부-국무부를 중심으로 통일부와 양국 국방부 등 유관부처가 모두 참여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북미 주도의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남북 교류협력 사업의 동시 이행을 위해 상황을 공유하고 필요한 논의를 하기 위한 일원화된 소통 창구였다.
그런데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 교류협력사업의 속도가 북미 비핵화 협상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판단하에, 대북제재 등을 내세워 사업에 자주 제동을 걸었다. 남북 철도·도로 현대화 사업의 착공식과 대북 독감 치료제 지원에 사용할 트럭 몇 대가 북한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이 전략물자 반출을 금지한 대북제재 위반이라며 남북이 합의한 일정대로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
당시 워킹그룹은 정부의 북핵 수석대표인 외교부의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현 외교전략정보본부장·차관급)이 맡고 통일부는 실무 인력을 파견했는데, 통일부 내에서는 외교부가 '대미 공조'에 너무 집착해 워킹그룹에서 통일부의 의견을 제대로 개진하지 못했다는 인식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 진보 성향의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맡았던 임동원(25·27대)·정세현(29·30대)·이재정(33대)·조명균(39대)·김연철(40대)·이인영(41대) 전 장관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과거 한미 워킹그룹 방식으로 대북정책 협의를 진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한미 워킹그룹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생산적인 기능이 아닌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고 제재의 문턱을 높이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비판했다. 특히 이들은 "외교부는 전문성이 없고, 남북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직격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외교부는 당초 한미 정례협의를 통상적인 외교당국 간 북핵 공조 협의 강화를 위한 채널로 활용한다는 방침이었지만, 7년 전의 워킹그룹을 의식한 통일부에서 NSC 등을 통해 이견을 내면서 대립 사안으로 확대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사건건 대립한 자주파-동맹파…"대통령이 결심해야" 지적도
정부 내 자주파와 동맹파의 갈등은 정부 출범 초기부터 이어졌다.
자주파로 분류되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북한이 지난 2023년 12월 주창한 '남북 두 국가론'을 차용하며 '현실적 두 국가론'을 전개했다. 그러자 정부 내 동맹파의 리더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남북 두 국가론은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며 "이를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부 입장"이라고 반박했다.
한미 연합훈련을 두고도 정 장관은 북한을 대화로 유도하기 위해 훈련의 중지나 축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위 실장은 "연합훈련의 중지 혹은 축소 문제를 남북 대화 카드로 고려하고 있지 않다"라고 맞불을 놓은 상태다.
이러한 대립은 동맹파가 주축을 이루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운영 방식에 대한 갈등으로도 이어졌다. 자주파의 원로들이 지난 3일 개최한 좌담회에서 문정인 연세대학교 명예특임교수가 NSC 상임위원장인 위성락 실장의 이름을 언급하며 "본인께서 이걸 잘한다고 생각해서 그 자리를 하시는 건데 제가 볼 때는 조정이 좀 필요하다"라고 언급한 것이다.
원로들은 2005년 정동영 장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맡았던 때를 상기하며 위 실장에게 사실상 공개적으로 NSC 상임위원장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실제 정 장관 본인도 NSC 회의 때 통일부 장관이 NSC 상임위원장을 맡아야 한다고 발언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두 인사는 이번 한미 정례협의에 통일부의 참여 여부를 두고도 NSC에서 격론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감정이 섞인' 듯한 통일부의 입장문이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는 관측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외교부 당국자도 "한미의 팩트시트에 대북정책을 공조한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고, 그래서 협의를 하는 것이다. 통일부는 이런 상황을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한미는 분명히 대북정책을 협의할 것"이라며 불편한 감정을 내비쳤다.
정부는 내년 4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전후로 한반도 정세에 '중대한 변곡점'을 만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당장 정부 내 갈등이 제대로 조율되지 않으면서 미국과의 소통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일각에선 오는 19일로 예정된 외교부와 통일부의 업무보고 때 이재명 대통령이 갈등을 조율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갈등이 원만하게 조율될지, 파열음을 내고 봉합될지는 미지수지만 갈등이 지속될 경우 대내외적으로 부정적 메시지가 확산할 가능성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지속되고 있어 대통령의 '결심' 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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