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중국이 반도체 생산을 위한 핵심 장비인 네덜란드 ASML의 첨단 노광장비 수입이 막히자 해외에서 중고로 구입한 부품을 자국 내 장비에 설치하는 방식으로 업그레이드를 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노광기는 빛을 이용해 반도체 웨이퍼에 아주 정밀한 설계도, 회로패턴을 인쇄하는 장비다.
중국이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노광기는 DUV(심자외선) 노광기로 이 가운데서도 트윈스캔 NXT:1980i 시스템과 같은 비교적 구형 장비만 살 수 있다.
이보다 신형인 2050i, 2100i DUV 노광기는 미국의 수출 규제로 구입할 수 없다.
현재 대만 TSMC나 한국 삼성전자 같은 첨단 반도체 업체들은 DUV 이후 세대인 EUV(극자외선) 노광기로 첨단 공정을 마무리한다.
FT는 소식통들을 인용해 중국이 EUV는 고사하고 신형 DUV 접근도 차단되자 해외에서 중고로 부품들을 사들여 자국의 구형 DUV 노광기를 업그레이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장비 제조사인 ASML은 규제에 묶여 업그레이드를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제3자가 반도체 공장에 파견돼 업그레이드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웨이퍼를 올려놓는 플랫폼인 스테이지, 빛을 반사하는 렌즈, 센서 등을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테크인사이츠의 댄 킴 수석전략가는 “중국 반도체 공장들이 TSMC나 삼성 같은 곳들이 활용 가능한 최고 장비에 접근하지 않고도 인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UV 없으면 5나노는 도박
반도체는 웨이퍼 위에 아주 얇은 층을 여러 개 쌓아 놓은 것 같은 형태로 구성된다. 이 미세한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빛으로 설계도를 그리는 DUV나 EUV 같은 장비가 필수적이다.
DUV는 빛의 파장이 길어 7나노미터 공정까지는 가능하지만 5나노 이하 공정에서는 수율이 잘 나오지 않는다. 빛을 여러 번 쏴(다중 패터닝) 가는 회로 설계도를 그릴 수는 있지만 이 과정에서 오류가 날 수 있고, 이 때문에 생산된 반도체 불량률이 높은 것이다.
반면 5나노미터 이하의 최첨단 반도체 공정에는 빛의 파장이 짧은 EUV가 반드시 필요하다.
중국이 DUV를 업그레이드한다고 해도 EUV만큼의 수율은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정부의 보조금 없이는 경제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그렇지만 AI 경쟁에 필수적인 첨단 AI칩을 엔비디아 등에서 구입할 수 없는 중국으로서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해 볼만한 도박이다.
물리학으로 승부 건다…입자가속기 노광기
중국은 렌즈부터 센서에 이르기까지 EUV 개발에 반드시 필요한 첨단 소재를 만드는 것이 어렵자 ‘거대 입자가속기(SSMB)’을 기반으로 한 노광기 개발에 들어갔다.
이른바 ‘반도체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중국의 반도체 독립 계획 가운데 하나다.
ASML의 노광기처럼 세밀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려운 중국은 발달한 물리학 기술을 토대로 입자 가속기에서 나오는 태양빛처럼 강력한 극자외선(EUV) 광원을 노광기에 활용하려 하고 있다.
축구장 크기의 입자 가속기에서 나오는 강력한 빛을 노광기 여러 대의 광원으로 삼아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도를 인쇄하는 방식이다.
성공만 하면 생산 비용을 대거 낮출 수 있을 전망이다.
특히 기존 EUV보다 성능이 더 뛰어나 2나노 공정에 들어가는 ASML의 최첨단 하이-NA EUV와 맞먹는 성능을 낼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입자가속기 노광기를 구현하는 것은 여전히 험난한 길이어서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렌즈의 정밀도, 스테이지의 움직임 등 넘어야 할 기술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미국이 장비 수출 통제로 중국의 반도체 독립을 사실상 부추겼다는 비판이 있지만 중국이 반도체 독립을 달성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 그동안 미국이 중국과 초격차를 벌릴 여유는 충분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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