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기범 기자 = 미국과 유럽이 전기차(EV) 전환 정책의 속도 조절에 나서면서 글로벌 자동차·배터리 업계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전동화 전환을 이끌던 정책 드라이브가 다소 약화하고,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완성차 업계는 파워트레인 다변화에, 배터리 업계는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대체 수요 확보에 무게를 싣는 모습이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9월 30일을 끝으로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100만 원)의 전기차 구매 보조금 지급 정책을 7년 앞당겨 조기 중단했다. 전기차 구매 결정의 핵심 요인인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면서 전기차 판매량은 급감했다. 시장조사업체 콕스 오토모티브에 따르면 지난 10월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동월 대비 30% 감소한 7만 4835대에 그쳤다.
전기차 판매 감소는 배터리 사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완성차 브랜드 포드는 LG에너지솔루션과 체결했던 9조 6000억 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납품 계약을 해지했다. 이에 앞서 SK온과의 합작 사업도 구조를 분리했다. 전기차 시장 불확실성 속에서 선행 투자 속도를 조절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유럽연합(EU)도 신차의 배출가스를 2035년까지 100% 감축하도록 한 기존 방침을 삭제하고, 2021년 대비 90% 감축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목표를 하향 조정하면서 2035년 이후에도 내연기관 차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업계에서는 이번 조치가 올해 역대급 판매실적을 기록 중인 유럽의 전기차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 올해 1~10월 전기차 판매는 전년 대비 26.2% 증가한 202만 대로, 연말까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시장 변화가 국내 자동차 업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분석은 엇갈린다. 업계에서는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전동화를 추진하는 동시에 하이브리드, 주행거리연장형 전기차(EREV) 등 파워트레인 다변화를 병행해 온 만큼 정책 변화에 따른 충격은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실제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팰리세이드, 텔루라이드 등 대형 스포츠유틸리티(SUV) 하이브리드차를 출시하는 등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확대하며 수익성과 판매 안정성을 동시에 노리고 있다.
유럽 시장에서는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시각도 있다. 현대차그룹은 아이오닉 3, EV2 등 유럽 맞춤형 소형 전기차 출시를 예고하며 전동화 공략에 집중해 왔다. 현대차·기아의 올해 1~10월 유럽 전기차 판매량은 15만 3161대로 전년 동기 대비 52.3% 증가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다만, 전동화 흐름이 가속화되는 유럽 시장 특성을 고려할 때 이번 정책 조정 논의가 실제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도 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에서는 전기차 전환 가속화와 충전 인프라 확대를 위한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며 "전기차 시장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에서는 중장기 에너지 전환 흐름을 고려할 때 현대차가 강점을 보이는 수소연료전지차(FCEV) 등 새로운 동력원에 대한 시장을 선점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현대차의 수소차 넥쏘는 최근 유럽 신차 안전성 평가 프로그램 ‘유로 NCAP’에서 최고 등급인 별 다섯(☆☆☆☆☆)을 획득했다.
다만, 배터리 업계는 고심에 빠진 모습이다. 최근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재생에너지 확산으로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는 에너지저장장치(ESS)를 돌파구로 삼고 있지만, 전체 산업에서 전기차 배터리 비중이 여전히 큰 만큼 단기간 내 실적 개선은 쉽지 않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업계 관계자는 "ESS가 성장 동력이 될 수는 있지만, 전기차 수요 회복 없이는 근본적인 체질 개선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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