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꽃밭에 놓은 ‘낙엽'…윤석화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
[파이낸셜뉴스] 빈소를 찾은 기자는 국화꽃 대신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라질 듯 바짝 마른 플라타너스 낙엽을 올렸다.
영정사진 속에서도 밝게 웃다보니 초라한 낙엽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낙엽이 그와의 인연을 설명하고 ‘그’를 각인시켜준 매개가 됐기에 감히 올렸다.
지난 19일 2년여 뇌종양 투병 끝에 사망한 1세대 연극 스타, 윤석화의 이야기다.
천상 예술가 '낙엽'
그를 ’낙엽‘의 이미지로 기억하게 된 건 20여년 전 가을이었다.
한 사람의 삶을 톺아보는 시리즈 기사에 윤석화의 이야기를 싣어보자는 생각에 섭외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다. 공연장 앞에서, 공연이 끝나면 대기실 앞에서 기다렸다. 말 그대로 뻗치기였다.
스타 배우로선 그런 기사에 쉽게 응하긴 어려웠을 듯 하다. 삶의 모든 걸 끄집어내 보여야 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막 서른이 된 젊은 기자의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섭외였을 듯 하다. 내지는 ’그’에 대한 팬심 덕에 저지른 무모한 섭외였을 수도.
세 번째 도전만에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가 졌다”고 말했다. 섭외 성공이었다.
20여 차례 만나면 서너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들었다.
'낙엽'은 여러 차례 취재가 있고 기자와 취재원간 경계심이 뭉툭해지던 2005년 11월의 어느날이었다. 서울 대학로의 정미소(현 한예극장)에서 공연이 끝나고 진행된 인터뷰라 꽤 늦은 시간이었다.
집으로 향하려던 기자에게 “와인 한잔 마시러 갈까” 물었다. 이미 스타였고 스무살이나 많아 ‘선생님‘이라 부르던 ’그‘와 대작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무슨 용기였는지, ‘그러자‘고 했다. 종로구 삼청동의 소박한 단골 와인바 앞에 차량이 멈춰 섰다. 차에서 먼저 내린 그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유도 모른 채 뒤따라 내리던 기자에게 뜻밖의 말을 건넸다.
"낙엽 봐."
요즘 말로 ’그’는 F였고 기자는 T였다. 속으로 ’낙엽이 뭐’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가 보였다. 가로등 노란 불빛이 붉고 노란 낙엽의 채도만 더한 게 아니었다. 해사한 '그'의 미소에 명도를 더한 듯 밝게 빛이 났다.
삶을 나누다
부고장에 적힌 대로 장례식장을 찾으며 20년간 이어온 인연을 감히 빈소 앞에 올리고 싶었다. 이미 겨울의 초입인데다, 비까지 온 길에서 낙엽을 찾았다. 내내 보이지 않던 낙엽이 장례식장 입구에서 눈에 띄었다. 그리고 국화 꽃 옆에 소박하게 올렸다.
1세대 스타 연극배우의 마지막 가는 길에 사람들은 그렇게 낙엽과는 또 다른 형태의 추억을 안고 장례식장을 찾았다. 한국의 '재즈 1세대' 가수 김준은 아내와 함께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와 고인을 기렸다.
그저 무대 위 '그'라서가 아니었다. 20년 넘게 인연을 이어오면서 삶의 나눔을 봤다. 스무살 어린 기자의 부모님 생일을 대신 챙겨줄 정도로 선, 후배 동료를 챙겼다.
공연이 끝나고 정미소 로비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누구나 알만 한 가수, 작곡가, 배우와 연주가들이 찾아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무대 후배들에겐 앞서 경험한 길을 알려주는 선배였다. 21일 정미소 앞에서 가진 노제에서도 후배들은 '그'가 불러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 '꽃밭에서'를 불렀다.
그의 선한 영향력이 주변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도 했다.
'공연 보러 오라'는 얘기에 공연장에 가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바자 공연이었다. '박봉'의 기자도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냈다. 배우들은 자선 바자의 성공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대에 올랐다.
장례식장에 조문 온 이들에게 나눠준 책도 배우 윤석화 뿐 아니라, 선배 윤석화, 어려운 이들을 챙기던 윤석화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였다.
69년, '그'의 삶에도 과오는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추억을 떠올리는 건 자신의 '과'를 반성하면서 무대 위나 아래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일 듯 하다.
그 삶을 기억하며 기자 개인이 건네는 작별 인사의 방식은 '그'의 앞에 놓은 낙엽 하나다.
유족은 장지에 낙엽을 가져가겠노라 약속했다.
윤석화를 추억하며...
2005년 10월의 어느 날 연극배우 윤석화씨(오른쪽)와 서울 대학로 정미소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서윤경 기자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한 시대가 저물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지만, 새로운 시대의 근간은 이전 시대입니다. 그 지점에서 '서 기자의 라떼'를 시작합니다. 취재 현장에서 지내온 시간과 경험을 끄집어내 '그 때'를 반추하고 '새로운 때'를 바라봅니다. <편집자주>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한 시대가 저물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지만, 새로운 시대의 근간은 이전 시대입니다. 그 지점에서 '서 기자의 라떼'를 시작합니다. 취재 현장에서 지내온 시간과 경험을 끄집어내 '그 때'를 반추하고 '새로운 때'를 바라봅니다. <편집자주>
y27k@fnnews.com 서윤경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