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기고] 한국 화학산업의 경쟁력을 다시 설계하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23 18:13

수정 2025.12.23 18:12

이영국 한국화학연구원장
이영국 한국화학연구원장


한 해가 저물어간다. 연말이면 우리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한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지금 구조적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중국발 공급 과잉과 글로벌 경쟁 심화, 수요 둔화, 그리고 탄소중립과 환경 규제 강화라는 복합 위기 속에서 기존의 범용 중심 생산 구조는 명확한 한계를 드러냈다.

다행히 지난 19일 석유화학업계가 에틸렌 공급과잉 해소를 위한 사업재편안을 정부에 제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이후를 어떻게 설계하고 실천하느냐다.

이러한 전환기에 출범한 '화학산업 혁신 얼라이언스'는 한국 화학산업 재도약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특히 수요 앵커기업 중심의 연구개발 과제 기획이라는 명확한 방향 설정은 그 의미가 크다. 이는 공급자 중심 연구개발에서 벗어나 실제 시장과 산업이 요구하는 기술 수요를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패러다임 전환의 선언이다.

이번 얼라이언스는 반도체, 이차전지, 미래차 등 국가 전략 전방산업을 핵심 축으로 협력 구조를 설계했다. 화학산업을 개별 산업이 아닌, 전방산업의 기술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기반 산업으로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더불어 AI 기반 소재 설계와 공정 개선을 연구개발 범위에 포함한 것 역시 시의적절하다. 데이터와 인공지능의 융합은 개발 속도를 가속화하고 시행착오를 최소화해 고부가 스페셜티로의 전환을 앞당길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오늘날 화학산업의 경쟁력은 더 이상 생산 규모나 범용제품의 가격 경쟁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반도체용 초고순도 소재, 이차전지용 기능성 소재, 미래차용 첨단 고분자 소재와 같은 고기능·고부가 핵심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술 역량이 경쟁력의 본질이 됐다.

이러한 기술 전환은 환경·기후 정책 측면에서도 불가피하다.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이행을 앞둔 지금, 에너지 효율 개선과 공정 혁신, 저탄소·친환경 소재로의 전환 없이는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글로벌 환경 규제 강화는 이제 수출 경쟁력의 필수 조건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개별 기업의 노력에만 맡기기에는 전환 속도와 비용 부담이 과중하다. 화학산업 혁신 얼라이언스는 수요 기업, 소재 기업, 연구기관, 학계 등 모든 생태계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해 연구개발부터 사업화까지 연결하는 전주기 협력 플랫폼을 구축했다. 이는 설비 합리화 이후를 준비하는 기술 생태계의 밑그림이다.

'화학(chemical)'의 어원은 연금술을 뜻하는 '알케미(alchemy)'에서 비롯됐다. 이탈리아의 화학자이자 작가 프리모 레비는 화학을 "사물을 다른 가치로 바꾸는 인간의 가장 이성적인 기술"이라 표현했다. 연금술이 납을 금으로 바꾸려 한 시도였다면, 오늘날 화학은 기술을 경쟁력으로 전환하는 산업이다.새해가 다가온다. 한국 화학산업 역시 지금 이 순간,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
설비 합리화 이후의 해답은 분명하다. 수요에서 출발하는 연구개발, 고부가 스페셜티와 친환경 소재로의 신속한 전환, 그리고 전방산업과 함께 성장하는 기술 경쟁력 확보다.
화학산업 혁신 얼라이언스가 한국 화학산업의 새로운 경쟁력을 여는 시작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영국 한국화학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