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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리는 4만개의 손을 잘랐다"..'타지마할의 근위병'이 던진 질문 [주말엔 공연 한 잔]

김희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27 10:00

수정 2025.12.27 10:00

2025년 다시 돌아온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아름다운 궁전 뒤에 숨겨진 '잔혹한 절대 권력'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서 1월 4일까지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공연사진 /사진=해븐프로덕션 제공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공연사진 /사진=해븐프로덕션 제공

[파이낸셜뉴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 눈앞에 있다. 그리고 그 건물 뒤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명령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 그 누구도 이처럼 아름다운 건물을 다시 지을 수 없도록 건물을 지은 이들 2만 명의 손을 자르라는 냉혹한 명령이다. 절대군주의 명령을 받은 게 나라면, 과연 미치지 않고 이 일을 수행해낼 수 있을까.

지난 2017년 이후 8년 만에 다시 국내 무대에 오른 라지브 조셉의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Guards at the Taj)’은 이 잔혹한 질문을 관객의 눈앞에 핏빛으로 들이민다.

영원한 사랑의 상징, 타지마할이 품은 잔혹한 野史

인도의 아그라, 야무나 강가에 자리 잡은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세상을 떠난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거대한 묘역이다.

타지마할이라는 이름은 '궁전의 왕관'이라는 뜻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미와 눈부신 백색 대리석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인류가 만든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손꼽히며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 지상 최고의 낙원을 완성하기 위해 1632년부터 약 2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일 2만여 명의 장인과 노동자가 동원된 것으로 전해진다.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세계 각지의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참여했으며, 티베트의 터키석과 미얀마의 옥 등 아시아 전역에서 공수한 최고급 자재가 사용됐다. 특히 태양의 각도와 달빛에 따라 황금빛, 핑크빛, 푸른빛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신비로운 돔은 당시 건축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찬란한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섬뜩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대부분의 전설이 그렇듯 비공식적인 여러 버전의 ‘후일담’이 있는데, 완공 직후 황제가 건축에 참여한 장인들의 손목을 모두 자르고 눈을 파냈다는 끔찍한 야사가 대표적이다. 역사적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이 잔혹한 구전 설화는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의 핵심 모티브가 되어 관객들을 향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핏물 위에서 미끄러지는 우리의 죄의식

극은 1648년 인도, 타지마할의 완공을 앞둔 어느 새벽에서 시작된다. 황실 근위병인 '휴마윤(최재림·백석광 분)'과 '바불(이승주·박은석 분)'은 타지마할을 등진 채 보초를 서고 있다.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는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자유로운 영혼 바불과 원칙주의자 휴마윤의 만담이 1장 내내 유쾌하게 흐른다.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공연사진 /사진=해븐프로덕션 제공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 공연사진 /사진=해븐프로덕션 제공

그러나 이들의 평화는 황제의 명령이 내려오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이 문장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물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끔 공사에 참여한 장인 2만 명의 두 손을 자르라는 황제의 명령. 그것은 물리적인 학살이자, 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사형 선고였다.

1장에서 보여준 정제되고 고요한 새벽의 공기는 2장 시작과 동시에 단숨에 불안하고 숨막히는 핏빛 공기로 뒤바뀐다. 무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물 위로 붉은 조명이 떨어지고, 2만 명의 손-그러니까 총 4만 개의 손목을 자르고 인두질을 하느라 지쳐버린 두 명의 근위병들은 그 핏물 위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와 직면한다.

객석의 관객들도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타지마할의 눈부신 백색 대리석이 실은 4만 개의 잘린 손과 붉은 피 위에 세워졌음을 시각적으로 체험한다. 동시에 두 근위병이 피를 씻어내기 위해 몸부림칠 때마다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철벅임에, 4만 개의 손이 잘려나가던 그날 밤을 상상하며 그들의 입장에 자신을 집어넣어 보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바불이 자신이 자른 손들에 짓눌려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은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개인이 겪는 트라우마를 날카롭게 포착한다. 반면, 그 시스템에 순응하며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쓰는 휴마윤의 고뇌 또한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우리는 90분의 시간 내내 바불이 되기도 하고, 휴마윤이 되기도 하면서 황제의 명령과 정언명령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현실의 우리와 괴리되어 있는 저 먼 17세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2025년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고, 도덕과 양심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며 어떤 이들에게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던지는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사진=해븐프로덕션 제공
/사진=해븐프로덕션 제공

드넓은 무대 위, 관객들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휴마윤과 바불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인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시카고', 등에서 인상을 남긴 배우 최재림이 2017년 초연에 이어 이번 재연도 함께하며, 연극 ‘보이즈 인 더 밴드’, ‘지킬앤하이드’, ‘햄릿’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정교하게 표현해 온 백석광이 서열을 중시하는 근위병 휴마윤 역할을 맡았다.

발명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근위병 바불 역할로는 연극 '벚꽃동산', '햄릿'의 이승주와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연극 '시련'의 박은석이 출연한다. 최재림·이승주, 백석광·박은석이 고정으로 함께 공연하며, 90분 내내 팽팽한 연기를 선보인다. 연출은 '그을린 사랑'으로 백상연극상을 받은 신유청 연출가가 맡았다.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은 서울 마곡에 위치한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에서 내년 1월 4일까지 공연된다.

"요즘 어떤 공연이 볼 만하지?" 공연 덕후 기자가 매주 주말, 공연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쏟아지는 작품의 홍수 속에서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관객들을 위해, 기자가 직접 보고 엄선한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당신의 주말을 채워줄 즐거운 문화생활 꿀팁, [주말엔 공연 한 잔]과 함께 하세요.

bng@fnnews.com 김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