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경제

AI 패권 전쟁, H200이 던진 질문…통제인가 자립인가

이병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28 14:52

수정 2025.12.29 00:38

미중 AI 패권 전쟁 속에 H200이 던진 화두…중국의 자립 능력 미국 통제 넘을까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달 엔비디아의 고성능 AI 칩 H200의 중국 수출을 제한적으로 허용한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서 뜨거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과 산업 주도권 경쟁이 결국 미·중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의 승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인식 속에 이번 조치를 둘러싼 찬반 대립이 격화되는 모습이다.

중국의 AI 기술 발전을 차단하기 위해 수출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과도한 통제가 오히려 중국의 기술 자립을 촉진해 미국의 AI 주도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반론이 맞서고 있다. 일부 고성능 AI 칩 수출을 통해 중국의 미국 기술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다만 미국 내 논쟁이 뜨거운 것과 달리 중국의 반응은 비교적 차분하다.

중국은 미국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기 위한 AI 기술 독립에 속도를 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H200 수출 통제 완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분위기다.

미국과 중국의 초대형 기술기업들의 지출 비교(B는 10억달러, 단위 미국 달러)
미국과 중국의 초대형 기술기업들의 지출 비교(B는 10억달러, 단위 미국 달러)

컴퓨팅 파워…중국의 가장 큰 약점


27일(현지시간) 워싱턴DC 소재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CFR)에 따르면, AI 분야에서 미국이 중국을 앞설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컴퓨팅 파워(연산 능력)다. AI 경쟁력은 ▲데이터 ▲인재(연구자) ▲알고리즘 ▲연산 능력(Compute) ▲전력·인프라 등 다섯 가지 요소로 좌우된다.

중국은 데이터, 인재, 알고리즘 분야에서는 미국과 비슷하거나 일부 영역에서는 앞선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연산 능력, 즉 컴퓨팅 파워에서는 미국에 뒤처져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컴퓨팅 파워 경쟁력의 핵심은 결국 AI 칩이다. 중국 AI가 미국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인재나 자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AI를 구동할 '엔진(칩)'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CFR은 이러한 이유로 화웨이의 AI 칩 성능이 미국 대비 약 5배 뒤처져 있으며, 2027년에는 그 격차가 17배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는 미국과 동맹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가 실제로 효과를 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화웨이가 제시한 로드맵을 보더라도 기술 진전이 정체돼 있고 생산 능력에도 한계가 있어 미·중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화웨이용 고성능 AI 칩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SMIC는 미국과 동맹국의 장비 수출 통제로 7나노 공정에 머물러 있다. 반면 TSMC와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에 진입했다.

또 화웨이가 성능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대량 생산으로 승부를 보려는 전략 역시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화웨이가 2027년까지 AI 칩 생산량을 100배 늘린다고 해도 엔비디아 생산량의 절반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엔비디아와 화웨이의 AI 칩 개발 로드맵
엔비디아와 화웨이의 AI 칩 개발 로드맵


"완전 차단은 역효과"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국이 독자적인 AI 생태계를 완전히 구축하기 전에, 미국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전략적으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때문에 일부 고성능 AI 칩 수출을 통해 중국의 기술 발전을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두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논리다.

이번에 수출이 허용된 H200은 과거 중국 판매가 허용됐던 H20보다 성능이 약 6배 높다. 다만 엔비디아의 최신 최고 성능 칩인 블랙웰보다는 성능이 낮다.

트럼프 행정부의 AI 및 암호화폐 정책을 총괄하는 데이비드 삭스는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최첨단 기술이 아닌 칩의 광범위한 판매를 허용하면 중국 AI 개발자들이 미국 기술에 '중독'돼 엔비디아의 시장 점유율을 유지할 수 있고, 화웨이와 같은 경쟁사의 성장을 제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완전한 수출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수출 허용의 배경으로 꼽힌다. 중국 내에서 고성능 AI 칩을 필요로 하는 기관과 개인들은 이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불법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뉴욕 브루클린에 거주하던 한 중국인 남성은 AI 칩을 구매하면서 미국이나 판매 제한이 없는 국가의 고객용 제품인 것처럼 허위로 표시한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엔비디아 라벨을 제거하고 '샌드키안(Sandkyan)'이라는 가짜 회사명으로 다시 라벨을 붙인 뒤, 해당 칩을 일반 컴퓨터 부품으로 위장해 중국이나 홍콩으로 배송한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에는 여행 가방에 칩을 숨겨 밀수하는 사례도 크게 늘고 있다.

결국 미국은 일부 고성능 칩의 제한적 수출을 통해 중국 AI를 완전히 차단하기보다는 '통제된 공급자(controlled supplier)'로 남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중국의 차가운 반응…"관심은 이미 기술 독립에"


중국의 반응은 예상보다 냉담하다. 중국 정부는 공개적인 환영 메시지를 내놓는 대신 알리바바, 바이트댄스, 텐센트 등 주요 기술 기업들을 소집해 대응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관심사는 더 이상 단순한 고성능 AI 칩 확보가 아니라 기술 자립과 장기적 주권 확보에 맞춰져 있다는 분석이다.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의 연구원인 양젠리는 "중국의 전략은 정밀한 수입 통제, 시간 벌기, 자립, 완전한 기술 주권 확보, 그리고 궁극적으로 미국을 따라잡거나 앞서는 것"이라며 "이러한 전략은 미국의 수출 통제 정책 변화와 무관하게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중국은 이달 정부 공식 조달 목록에 중국산 AI 칩을 포함시키는 행정 조치를 발표했다.
국가 기관과 국유기업이 중국산 AI 칩을 우선적으로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개정이다.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국가 자금이 투입되는 신규 AI 데이터센터에 자국산 AI 칩만 사용하도록 의무화하는 지침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반도체 산업에 최대 7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