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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표현의 자유가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29 18:39

수정 2025.12.29 18:39

언론과의 전쟁에 나선 트럼프
兆단위 소송으로 전방위 압박
언론은 MAGA 비판 결국 멈춰
與 '가짜뉴스 5배 손배' 법추진
李대통령도 '표현의 자유' 수혜
각계 거부권 행사 권유 새겨야
노동일 주필
노동일 주필

ABC뉴스 1500만달러(약 206억원). CBS방송 모기업 파라마운트 1600만달러(약 220억원). NBC뉴스 1600만달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언론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받아낸 합의금 액수다. 2024년 대선 국면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했다거나, 과거 한 여성이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로 제기한 성폭력 소송에서 잘못된 보도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 등이다.

미국의 경우 대통령 등 공인(public official)이 언론을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리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관련 기사가 거짓이며, 허위임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 기준을 충족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도와 논평 등 언론의 자유는 세속의 성서(secular Bible)라고 불릴 정도인 미국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의 핵심이다.



그럼에도 거대 언론사들이 합의금 형식으로 무릎을 꿇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손해배상 청구는 대개 최대 200억달러(약 28조원)에 이른다.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액이 일단 위협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하 양원을 장악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이다. 경영진 입장에서 비용은 물론 권력자를 상대로 지난한 소송 과정을 거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CBS가 합의한 시점은 모회사인 파라마운트 글로벌이 대규모 인수합병 승인 건을 앞둔 시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NYT)를 상대로 150억달러(약 21조원), 월스트리트저널(WSJ)을 상대로 100억달러(약 14조원)를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은 진행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보냈다는 '외설 편지' 의혹 관련 '허위보도'로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주장이다. "압박에 굴복하지 않겠다"(NYT), "열성적으로 방어하겠다"(WSJ)는 입장이지만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언론이 트럼프 행정부에 항복하는 걸 멈춰야 한다. 수정헌법 1조와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 미 연방통신위원회(FCC) 애나 고메즈 위원의 비판이다. 하지만 미국 언론 스스로 트럼프 대통령과 마가(MAGA) 진영 비판을 자제하거나 자체 검열을 강화하는 등 언론자유와 민주주의가 위축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난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른바 '허위·조작정보근절법'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허위나 조작된 정보 유통 금지를 목적으로 한다. 개정안은 '손해를 가할 의도나 부당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타인의 인격권·재산권 및 공익을 침해하는 허위·조작정보의 유통을 금지'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허위·조작정보 유포로 인한 손해가 인정되면 법원이 5000만원 범위 안에서 손해액을 추정할 수 있도록 하며, 인정된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 책임을 부담토록 하는 내용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법안에 대한 비판은 주로 야당과 보수진영에서 제기되어 왔다. 이례적으로 이 법안에 대해서는 진영을 막론하고 비판이 나온다. 주관적 의사, 추상적 개념을 기준으로 허위조작 정보를 판단하는 점, 일부가 허위인 경우도 규제대상으로 하는 점, 허위조작 정보 프레임을 씌워 '입막음 소송'이 난무할 가능성 등 다양한 문제가 있다. 허위·조작정보라는 이유로 개인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 국가가 폭넓게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은 점도 지적된다. 허위·조작정보에 대해서는 현행법으로도 얼마든지 규제가 가능하다. 우리의 경우 사실적시·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의 경우 손해배상 소송은 물론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다. 특히 사실 적시로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까지 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과잉규제라는 비판에도 개정안을 강행한 속내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재명 대통령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의 가장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 2020년 대법원이 허위사실 공표혐의로 기소된 이재명 경기지사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밝힌 이유이다. 지난 3월 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도 이 판례를 원용했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에 대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권유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청와대는 국회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아직 시간은 있다. 연말연시를 거치며 충분히 숙고한 후 공포 여부를 판단하기 바란다.
표현의 자유가 생존할 숨 쉴 공간은 곧 민주주의가 숨 쉴 공간이기도 하다.

dinoh7869@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