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fn광장] 다시, 벤처 DNA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2.31 19:11

수정 2025.12.31 19:10

'사막에서 나무를 심은' 1세대
현장 뛰면서 초기 생태계 구축
닷컴버블 이겨낸 30년 도전기
AI대전환 물결 새로운 갈림길
글로벌 표준 주도는 가야 할 길
실패비용 나누는 유연한 구조로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쇼클리연구소를 나온 8인의 배신자가 1953년 설립한 페어차일드가 미국 벤처 1호로 꼽힌다. 쇼클리연구소를 이끈 윌리엄 쇼클리는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노벨상을 거머쥔 시대적 인물이지만 8명의 천재는 그의 괴팍함에 질려 등을 돌렸다. 페어차일드는 세계 최초로 반도체 핵심 부품 집적회로(IC)를 만들어내고 분화한다.

인텔과 AMD가 여기서 나왔고, 실리콘밸리의 자금줄 세쿼이어캐피털의 뿌리도 페어차일드였다. 세쿼이어가 지금껏 투자한 회사는 애플부터 오라클, 페이팔, 구글 등 무수히 많다.

엔비디아가 창업 초기 파산 직전에 몰렸을 때 손을 뻗은 곳도 세쿼이어였다. 페어차일드는 사라졌지만 관련 인물들과 기술은 연쇄창업의 씨앗이 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실패=벤처 자산' 공식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도 페어차일드는 실리콘밸리의 교과서로 남아 있다.

한국의 벤처 1호는 1981년 카이스트 출신 이범천이 교수직을 내려놓고 서울 안암동 셋방에서 5000만원 자본금으로 창업한 큐닉스컴퓨터다. 한글워드프로세서를 만들었고, 창업한 지 1년 만에 흑자를 기록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한국에서도 벤처가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일깨웠으나 큐닉스는 1997년 외환위기 파고를 넘지 못한다.

큐닉스를 효시로 한 한국 벤처가 토대를 형성하기 시작한 시기는 큐닉스의 퇴장기와 공교롭게도 겹친다. 이범천의 후배이자 카이스트 동료 교수였던 이민화가 한국 벤처사에 남긴 족적은 두루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재직 중 설립한 의료기기 벤처 메디슨은 기술과 영업력으로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며 벤처를 시대의 화두로 끌어올렸다.

국내에서 '벤처'라는 단어가 처음 공식화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95년 10월 말 늦은 저녁 서울 역삼동 중국식당에 이민화를 비롯한 13명이 차례로 들어선다. 기술은 있으나 자금, 인력, 시장 3대 난제를 홀로 풀기 힘든 창업자들이 함께 헤쳐나가자는 결의를 한다. 한글과컴퓨터를 만든 이찬진, 터보테크의 장흥순 등이 멤버였다. 벤처기업협회는 그로부터 한달여 뒤 깃발을 올린다.

한국 벤처는 그렇게 새벽을 맞았다. 1세대 벤처인들은 대학가 현장을 돌며 로드쇼를 펼쳤다. 널리 인재를 모으고 벤처 동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행사 때마다 내건 캐치프레이즈가 '한국의 빌 게이츠여 모여라!'였다. 로드쇼에 자극받은 학생들과 연구원들이 하나둘 창업 동아리를 꾸렸다. 로드쇼는 '벤처 새마을운동'으로 불리며 가는 곳마다 관객을 구름처럼 불러 모았다. 벤처 새마을운동은 실험실 창업운동으로 확대된다. 실험실 1개에 벤처기업 1개 만들기 캠페인이었다. 벤처 사업가가 신랑감 1순위로 떠오른 것이 이때였다.

'사막에 나무 심는 사람'을 자처한 1세대는 각계를 설득해 제도를 이끌어낸다. 코스닥 시장(1996년)과 벤처기업특별법(1997년)은 그 결정판이다. 외환위기로 실직한 가장, 청년 실업자들을 흡수한 곳도 벤처다. 당시 민관이 함께 추진한 '10만 웹마스터 양성 운동'은 갈 곳 없는 대졸자들을 정보기술(IT) 고급인력으로 키워낸 공신이다. 다음, 네이버 등 포털업체들이 플랫폼 주권을 다질 수 있는 토대가 됐음은 물론이다.

시련은 외환위기 이후 예고 없이 닥쳤다. 2000년대 닷컴버블 붕괴로 대규모 도산, 투자 혹한기가 이어졌다. 정부가 뒤늦게 내놓은 벤처 건전화대책은 옥석 가리기보다 벤처 장기침체를 부추겼다. 10여년간 이어진 벤처 빙하기를 녹인 건 스마트폰 모바일 시대 혁신의 무리들이 전면에 나서면서다. 콘텐츠, 금융, 운송업에서 한국 벤처 DNA가 명맥을 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지금은 1세대가 씨를 뿌린 이후 30년이 흐른 시간이다. 인공지능(AI) 대전환 물결 속에 한국 벤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내수를 넘어 글로벌 표준을 만드는 것이 시대적 과제가 됐다. 벤처 4세대로 분류되는 AI 반도체 기업 퓨리오사와 리벨리온이 이 도도한 흐름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은 희망을 갖게 해준다. 이들을 잇는 제2, 제3의 퓨리오사, 리벨리온을 키울 토양은 정부 몫일 수밖에 없다.

창업을 독려할 제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30년 전 500개도 안됐던 벤처는 지난해 4만개까지 육박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한국 벤처의 DNA다.
실패의 비용을 사회가 나누고, 실패를 감내하는 유연한 구조를 만드는 일이 남은 관건이다. 병오년 붉은 말의 해가 솟았다.
한국 벤처의 도전과 모험을 응원한다.

jins@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