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쿠팡은 '2017년 대한민국'도 무시했다... 우리는 지켰고, 그들은 내줬다 [서 기자의 '라떼']

서윤경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1.05 16:17

수정 2026.01.05 16:17

[두개의 키워드, 농축산물과 영어]
2017년 FTA 개정 협상 때 농축산 개방 막아낸 한국
영어 오번역 논란 없애기 위해 촉각 곤두세으며 협상
2025년의 쿠팡, 한국 농축산물 개방 앞세워 美 로비
청문회 방패로 쓴 '영어'... 사과문도 교묘하게 바꿔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0회 국회 쿠팡 침해사고 및 개인정보 유출, 불공정 거래, 노동환경 실태 파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연석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마치고 돌아서고 있다./사진=뉴스1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0회 국회 쿠팡 침해사고 및 개인정보 유출, 불공정 거래, 노동환경 실태 파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연석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를 마치고 돌아서고 있다./사진=뉴스1

[파이낸셜뉴스] 사실상 전 국민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배달 노동자의 과로와 산재도 잇따라 발생했다. 논란은 끊이지 않는데 반성은 없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피해 규모 축소와 미흡한 사후 대처로 일관하더니 지난해 12월 30~31일 이틀간 국회에서 열린 연석 청문회에선 대한민국 국회와 국민을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쓴맛을 남긴 쿠팡의 태도에 씁쓸함을 더한 건 2017년이 떠올라서다.

당시 전 세계는 패권국가인 미국에서 그 동안 본적 없는 유형의 지도자가 탄생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다.

마지노선 '농축산물'…쿠팡에겐 美 로비 수단

지난 2017년 11월 한미 FTA 대응대책위원회 소속 축산업 관계자들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위한 공청회에서 강성천(왼쪽)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에게 FTA 재협상 반대 및 폐기를 촉구하며 항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2017년 11월 한미 FTA 대응대책위원회 소속 축산업 관계자들이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미 FTA 개정 협상을 위한 공청회에서 강성천(왼쪽)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차관보에게 FTA 재협상 반대 및 폐기를 촉구하며 항의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 2017년 11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선 당시 산업통상자원부가 마련한 공청회가 갑작스럽게 중단됐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피켓을 든 이들이 목소리를 높인게 중단의 이유였다. 언론사 카메라는 일제히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날 현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을 위한 공청회였고 현장에 나타난 이들은 농축산업계 관계자였다. 요구는 하나였다. '한미 FTA 재협상 반대 및 폐기'와 농축산물 보호였다.

이들이 우려한 건 상대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만성 무역적자를 해결하겠다며 관세 전쟁을 선언했다. 2011년 한미 FTA를 체결할 때 지켜낸 농축산 시장이 이번 개정 협상에선 위기가 될 거라고 봤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대미 무역 흑자국을 대상으로 무역적자 원인을 분석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대상은 16개국이었고 중국, 독일, 일본과 함께 한국도 포함돼 있었다. 불공정 무역에 징벌적 관세를 매기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여기에 중국과 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에서 생산하는 태양광 패널과 세탁기에 긴급수입 제한조치를 발동해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안보 위협을 이유로 무역확장법 232조를 가져와 수입 철강에 25% 일률 관세를 부과하겠다고도 했다.

국가간 무역 장벽을 허물어 경제 통합을 이루는 FTA는 힘을 쓰지 못했다. 캐나다, 멕시코와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일방 폐기하더니 한국엔 FTA 개정을 요구했다.

결국 트럼프 1기 때 한국의 철강은 2015∼2017년 연평균 수출량(약 383만t)의 70% 수준인 263만t까지 무관세 쿼터를 적용 받기로 했다. 이 쿼터는 지금도 유지 중이다. 2018년 3월 타결한 FTA 개정 협상에선 2019년 시행 예정이던 ‘한국산 픽업트럭 보호 관세 25% 철폐’ 시점을 2038년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농축산물 시장의 추가 개방이 없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올해 농축산업계는 또다시 긴장했다. 지난 1월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는 1기 때보다 더 강한 관세 전쟁을 예고하더니 한미 FTA도 무시했다.

평행선을 달리던 양국의 관세 협상은 지난해 10월 이재명 대통령이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국을 찾은 트럼프 대통령과 대화에 나서며 극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농축수산물 추가 개방은 막아냈다고 밝혔다.

이처럼 매번 농축산물 개방 위기는 찾아왔고 우리 정부는 지켜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지키려 노력하는 만큼 미국에 '한국 농축산물 시장 개방'은 숙원이었다.

그런 점에서 쿠팡은 미국 기업다웠다. MBC와 JTBC가 입수한 쿠팡의 로비 보고서를 보면 관세 협상이 한창이던 지난 해 3분기 쿠팡 측은 미 연방 의회에 "미국 농축산물 생산자들이 쿠팡의 인프라를 더 많이 활용하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쿠팡의 국내 유통망으로 미국산 농축산물의 한국 진출을 돕겠다는 말로 사실상 한국 농축산물 시장의 개방이었다.

쿠팡의 '영어' 사용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2차 협상을 위해 양국 협상단이 지난 2018년 1월 3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마주앉은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2차 협상을 위해 양국 협상단이 지난 2018년 1월 3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마주앉은 모습.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1기 시절 우리 정부가 관세 협상 테이블에 나설 때 긴장한 이유는 또 있었다. 대화의 언어인 '영어'였다.

당시 협상 테이블에 나섰던 산업부 관계자는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을 상대로 협상해야 하는 만큼 언어적 실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끼리 소통하며 확인에 확인을 했다"는 협상 뒷이야기를 전했다.

2011년 혹독한 경험을 한 게 도움이 됐다. 당시 유럽연합(EU)과의 FTA 협상문이 공개됐을 때 일부 영어 표현을 두고 우리 정부는 곤욕을 치렀다.

가령 “any product shall be subject to"라는 문장에선 '어떤(any) 조건 없이 모든 대상(product)에 적용됨'을 의미하는데 한글본에선 바로 그 '어떤'이 빠지면서 적용 범위 자체가 축소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김종훈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any'라는 형용사는 문맥상 반드시 필요하지 않으면 번역할 이유가 없다는 원칙을 세웠다. 전체 의역상 크게 해석의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국회와 시민단체의 생각은 달랐다.

한미 FTA 협정문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외교부가 2011년 6월 협정문 한글본의 번역 오류를 재검독한 결과 잘못된 번역 166건 등 총 296건의 오류를 찾아내 정정했다고 밝혔다. 이후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통해 외교부의 협정문 재검독 결과를 확인한 시민단체는 296건보다 더 많은 오류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2017년 한미 FTA 개정 협상 테이블에 나선 담당자들이 긴장한 이유였다. 오역이나 불분명한 표현으로 논란이 되풀이되는 걸 막아야 했다. 덕분에 개정 협상이 타결된 뒤 번역 논란은 없었다.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0회국회(임시회) 쿠팡 침해사고 및 개인정보 유출, 불공정 거래, 노동환경 실태 파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연석 청문회에 출석해 최민희 위원장의 동시통역기 착용 지시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스1
해롤드 로저스 쿠팡 대표이사가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30회국회(임시회) 쿠팡 침해사고 및 개인정보 유출, 불공정 거래, 노동환경 실태 파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연석 청문회에 출석해 최민희 위원장의 동시통역기 착용 지시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뉴스1

쿠팡은 신중하게 '영어'를 사용하던 한국 정부를 골탕 먹이기라도 하듯 '영어'를 무기로 쓰거나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개인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쿠팡이 지난 12월 26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한글 성명은 영문본과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불필요한 불안감'을 영문본에서 '잘못된 불안감(false insecurity)'으로 표현하더니 "쿠팡이 정보 유출 사태에 심각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는 '억울한 비판'"이라는 표현 역시 '잘못된 비난(false accused)'으로 썼다.

주어 자체를 바꾸기도 했다. "12월 1일, 쿠팡은 정부와 만나 전폭적으로 협력하기로 약속했다"라는 한글 문장을 영문본에선 "12월 1일, 정부가 쿠팡에 접촉해 와 전면적인 협조를 요청했다"라고 적었다.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한국이 과하게 비판한다는 인식을 미국에 심어주려는 의도가 보이는 영문본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실제 쿠팡 주식은 25일 사과문 발표 후 뉴욕증시에서 6.45% 급등했다.

연석 청문회에선 '영어'를 언어가 아닌 무기로 사용했다. 지난 12월 30일 해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대표는 국회 측 동시통역을 무시한 채 대동한 통역 담당자하고만 소통했다. 질문과 상관없이 자기 말만 하던 로저스 대표는 질의 과정에서 책상을 치며 “그만하자”는 안하무인격 발언까지 했다.

무시 당한 '2017년 대한민국'이 화났다

반성없는 쿠팡의 태도에 국민과 정부는 제대로 뿔이 났다.

과기정통부는 자료 보전 명령을 위반한 쿠팡을 경찰에 수사 의뢰하기로 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유출 정보의 도용 여부 등을 검토하기로 했다. 국세청은 쿠팡과 김범석 의장에게 제기된 탈세 여부 등을 검증하기로 했고 고용노동부는 쿠팡의 산재 은폐 등 실태 점검에 나서기로 했다.

국토교통부는 쿠팡 종사자 보호를 위한 사회적 합의안을 마련하기로 했고 법무부는 중국에 형사사법 공조의 신속한 이행을 요청할 예정이다.

가입자의 '탈팡' 인증도 확산되고 있다.

LS증권은 5일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 이후 이커머스 시장에서 쿠팡 이외 플랫폼으로의 수요 이동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600만명을 웃돌던 쿠팡의 일간활성이용자(DAU)는 지난달 말 1400만명대까지 감소했다.

농축산물을 지키려 애쓰고,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과의 협상에서 외국어인 '영어'로도 밀리지 않으려 분투하던 2017년 대한민국이 2026년 현재의 쿠팡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 답을 레프 톨스토이의 '인생론' 속 한 문장으로 대신할까 한다.

“그릇된 지식의 원인은 대상을 파악하는 잘못된 원근법에 있다.”

"역사는 기억한다"

2017년 11월 10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진행한 ‘한미 FTA 개정 관련 공청회에서 농축산 관계자들이 농축산 시장 개방을 우려하며 개정을 반대하고 있다./사진=서윤경 기자
2017년 11월 10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진행한 ‘한미 FTA 개정 관련 공청회에서 농축산 관계자들이 농축산 시장 개방을 우려하며 개정을 반대하고 있다./사진=서윤경 기자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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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27k@fnnews.com 서윤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