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도쿄=서혜진 특파원】일본 정치권은 4일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지상 공격을 감행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를 체포·압송한 것과 관련해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이라며 동아시아 불안정성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의 군사작전을 지지하기도, 비난하기도 어려운 딜레마에 빠진 일본 정부가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발표한 것과는 다소 온도차가 있다.
日 여야 "동맹국이더라도 힘에 의한 현상 변경 용납 안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집권 자민당의 오노데라 이쓰노리 안전보장조사회장은 이날 자신의 X(구 트위터)에 미군의 베네수엘라 군사 작전에 대해 "힘에 의한 현상 변경 그 자체"라며 "중국이나 러시아를 비판하는 논거와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오노데라 회장은 중국이 무력으로 대만해협의 현상을 변경하려는 시나리오를 언급하며 "미국이 강하게 맞서더라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는 국제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동아시아가 더욱 불안정해질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입헌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대표도 같은 날 미에현 이세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베네수엘라 공격에 대해 "주권국가를 상대로 한 행위로서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다 대표는 "동맹국이더라도 힘에 의한 현상 변경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철칙에 부합하는지 판단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의 공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칠 뿐"이라고 비판했다.
국민민주당의 다마키 유이치로 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서반구에서 자국의 세력권을 확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자신의 X에서도 "중국과 러시아가 '동반구'에서 유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용인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적었다.
공명당의 다니아이 마사아키 참의원 회장은 자신의 X에 "'법의 지배'에 기초한 지금까지의 외교 노선을 계속해서 관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재외 일본인의 안전 확보와 지원 체제 강화를 요구했다.
공명당의 오카모토 미쓰나리 정무조사회장도 X에서 "동맹국이라는 입장을 살려 미국에 우려를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는 5일 정부에 이를 공식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日 외무성 "민주주의 회복이 중요" 원론적 입장
한편 일본 정부는 이번 미국의 군사작전에 대한 구체적 평가를 자제하며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강조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날 오후 대변인 명의 성명을 통해 "상황을 주시하며 일본인 안전 확보에 최우선으로 대응하겠다"며 "관계국과 긴밀하게 협력해 정보 수집을 포함한 대응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외무성은 "일본 정부는 한시라도 빨리 베네수엘라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호소해 왔다"며 "이전에도 자유,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가치를 존중하고, 일관되게 국제사회에서 국제법 원칙의 준수를 중시해 왔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러한 입장에 기초해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회복, 정세 안정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외무성에는 연락실, 베네수엘라 주재 일본 대사관에는 현지 대책본부를 설치해 베네수엘라 체류 일본인의 안전 확보에 대응하고 있다며 "현시점에 일본인 피해 정보는 없다"고 전했다.
미국의 이번 군사작전은 일본 시간으로 3일 오후에 알려졌으나 외무성 성명은 거의 24시간이 지난 이후에 나왔다. 성명 발표자도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이 아닌 대변인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마땅한 묘수가 없는 상황에서 다소 어정쩡한 내용의 성명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역시 이날 오후 4시께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압축한 내용의 글을 올리는 데 그쳤다.
딜레마 빠진 日, 지지하기도, 비판하기도 애매
트럼프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공격 결정으로 다카이치 총리는 난제를 안게 됐다. 미일 동맹을 안보 정책 기축으로 삼는 상황에서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지만 군사작전에 국제법 위반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도통신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용인한다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해양 진출을 강화하는 중국에 '국제법을 무시해도 관계없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일본이 미국의 군사작전을 비판하면 중국과 갈등을 겪는 상황에서 미일 동맹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이에 다카이치 총리는 5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외무성 성명에서 벗어나지 않는 수준의 언급을 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앞으로 일본 정부는 주요 7개국(G7) 반응을 지켜보는 한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개최도 검토하면서 대응책을 수립할 것으로 보인다.
외무성 간부는 "지금까지 일본은 법의 지배에 기초한 주권과 영토의 일체성을 주장해 왔다"며 "국제법과 미일 관계라는 양쪽 관점에서 일본 입장을 어떻게 표명할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