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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배우' 안성기 별세..한국영화사의 산증인 "믿보배로 기억되고 파"

신진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1.05 09:50

수정 2026.01.05 11:03

향년 74세
배우 안성기가 5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하는 배우 안성기. 뉴스1
배우 안성기가 5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하는 배우 안성기. 뉴스1


[파이낸셜뉴스] 아역 출신 국민배우 안성기가 5일 별세했다. 향년 74세.

5일 한국영화배우협회에 따르면 안성기는 이날 오전 9시께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받던 중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 30일 자택에서 음식물이 목에 걸린 채 쓰러져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입원한 지 6일 만이다.

안성기는 지난 2019년 혈액암을 진단받은 뒤 2020년 완치 소견을 받은지 불과 6개월 만에 증상이 악화돼 다시 치료를 받는 등 힘겨운 투병 과정을 겪었다.

그는 1959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아역배우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길 위의 구도를 그린 '만다라'(1981·임권택 감독)와 한국 코미디 영화의 새장을 연 '투캅스'(1993·강우석)를 비롯해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이명세), '화장'(2015·임권택) 등 69년간 200여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2023년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오랜 투병 중에도 영화 현장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며 연기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국민 배우’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는 한때 부담이 컸지만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최고의 파트너로는 영화 ‘칠수와 만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 스타’에서 함께한 박중훈을 꼽았다. 대중에게는 “믿고 보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아버지 친구 김기영 감독 '황혼 열차'로 데뷔

1951년생인 안성기는 한국영화의 질곡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6살이던 1957년 데뷔작 ‘황혼열차’부터 2023년 ‘노량: 죽음의 바다’(특별출연)까지 70년 가까이 영화판의 현역 배우로 활동했다.

정식 연기 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현장에서 체득한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캐릭터 유형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얼굴을 만들어내는 배우로 평가받았다. 연기자를 ‘현장의 일부’로 여긴 겸손과 성실의 아이콘이자, 철저한 자기 관리로 스캔들 없는 연기활동을 이어왔다.

안성기는 영화 기획자였던 아버지의 친구 김기영 감독 작품 ‘황혼 열차’(1957)에 우연히 출연하면서 연기를 시작했다. 김 감독의 ‘10대의 반항’(1959)으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특별상을 받기도 한 그는 1950년대~1960년대 약 70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경동공립중학교 3학년 때 선배 배우 이순재와 같은 무대에 섰으며, 그곳에서 가수 조용필을 만났다.

애초 배우를 꿈꾼 게 아니라 고교 진학 이후 학업을 이유로 연기를 중단했고 군 복무까지 포함해 약 10년간 공백기를 가졌다. 20대 후반에는 전공인 베트남어를 살려 취업을 준비했으나, 베트남의 공산화로 진로가 막히면서 다시 영화계 복귀를 고려하게 됐다. 1970년대 후반 한국 영화계는 침체기였지만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기로 결심하고 1977년 ‘병사와 아가씨들’로 복귀했다.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로 성인 연기자로 자리매김

안성기는 지난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천국’과 가진 인터뷰에서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존중받는 환경이 되었으면 했다”며 영세한 산업 구조와 낮은 사회적 인식 속에서도 당시 성행하던 성인물 위주 작품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대신 현실성을 지닌 역할과 사회적 소재의 작품을 선택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이장호 감독의 ‘무릎과 무릎사이’(1984)와 ‘어우동’(1985) 등 일부 작품이 성인영화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분명한 주제의식을 지닌 작품으로 단순 비교는 어렵다고 평했다.

복귀 후 2-3년은 ‘제3공작’(1978) 등 반공·계몽영화의 조연을 맡다가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을 만나 전환점을 맞았고 이후 ‘만다라’(1981)로 임권택 감독, ‘꼬방동네 사람들’(1982)로 배창호 감독과 호흡을 맞추며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를 구축해 나갔다.

안성기는 1980년대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주역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대 들어 한국영화가 기획영화, 블록버스터 도입 등 두 차례의 산업적 변곡점을 거치는 동안에도 변화에 적응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50대에 접어든 2000년대에도 활동은 계속됐다. ‘무사’(2001), ‘실미도’(2003),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 ‘형사: 듀얼리스트’(2005), ‘화려한 휴가’(2007), ‘신기전’(2008) 등 액션 드라마와 블록버스터 등에 출연했으며, 저예산의 ‘부러진 화살’(2011), ‘화장’(2015) 등에서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했다.

연기 스펙트럼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어리숙한 캐릭터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지적인 캐릭터, 심지어는 까칠한 도시남자(‘그대 안의 블루’)도 소화했다. 왕초를 맡아 화제를 받았던 ‘고래사냥’(1984)의 민우, 비리 경찰 역할을 맡은 ‘투캅스’(1993)의 조형사, 역대급 정조로 평가받는 ‘영원한 제국’(1995)의 정조, 악역 변신이 돋보였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장성민, ‘실미도’(2003)를 이끄는 대장 역의 최재헌 준위, 사고뭉치 가수를 보살피는 매니저를 맡은 ‘라디오 스타’(2006)의 박민수 등이 있다. ‘한산:용의 출현’(2022)에서는 이순신 곁을 묵묵히 지키는 노장 어영담 역할로 위엄을 뽐냈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는 “안성기는 한국영화가 한참 상승곡선을 그리던 1950년대 말에 데뷔해 황금기라 일컬어지던 1960년대를 경험했고, 한국영화가 곤두박질치던 1970년대 말에 돌아와 1980년대 뉴 웨이브와 1990년대 산업적 격변을 모두 겪은 배우”라며 “생존하는 영화인 중 광복 이후 한국영화의 질곡과 변화를 이처럼 생생히 체험한 사람은 임권택 감독과 배우 안성기, 오로지 둘뿐이다”고 평했다.

한국 3대 영화상 휩쓴 대표 배우

고인은 한국 3대 영화상인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 트리플 크라운에 성공한 배우다.

주요 수상 내역을 살펴보면 1980년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바람불어 좋은 날’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1983년에는 ‘안개마을’로 제22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제19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수상했다.

1985년에는 ‘깊고 푸른 밤’으로 제24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제21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거머쥐며 198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주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1990년에는 ‘남부군’으로 제11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과 제1회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투캅스’로 제32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태백산맥’으로 제30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을, ‘투캅스’로 연기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기록을 남겼다.

2001년에는 ‘무사’로 제22회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2006년 ‘라디오 스타’로 제27회 청룡영화상과 제2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을, 2007년에는 같은 작품으로 제44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부러진 화살’로 제4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과 제3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노장 배우로서 흔들림 없는 저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2024년 대한민국예술원 영화분과 회원으로 선출됐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오는 9일 오전 6시 장지는 양평 별그리다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