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거대한 '용'이 관통하는 듯... 고통과 환상의 소용돌이 '출산' [Weekend 문화]

유선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1.09 04:00

수정 2026.01.09 04:00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이은실 개인전 '파고'
출산 과정에서 느낀 강렬한 인상 주제
"전쟁터 속 꿈꾸는 듯 파편화되는 순간"
무통 주사로 인한 환각 상태를 회화로
고군분투·절개 등 상흔 다룬 작품 눈길
축복으로 봉인된 생사 오간 아픔 전달
이은실 '에피듀럴 모먼트' 연합뉴스
이은실 '에피듀럴 모먼트' 연합뉴스
이은실 작가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 전시된 '멈추지 않는 협곡' 작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은실 작가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에 전시된 '멈추지 않는 협곡' 작품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를 낳고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그 속엔 다층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성 화가에게 출산은 찬가도, 비가도 아니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서랍 속에 넣어 뒀던 출산의 기억을 이번 전시에서 처음 꺼내들고 싶었다. 작가 이은실은 출산을 '축복'과 '기쁨'이라는 말로 봉인해 온 사회적 규범의 껍질을 벗기고 파도와 용암, 소용돌이와 안개로 가득한 풍경을 불러왔다. 삶의 큰 변곡점을 파도의 높이에 비유한 전시 제목처럼 화면마다 서로 다른 높이와 속도의 파고가 몸을 스쳐 지나간다.

출산이라는 강렬한 경험을 회화로 풀어낸 전시가 서울 종로에서 열린다.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은 이은실 개인전 '파고'를 오는 31일까지 개최한다고 8일 밝혔다.

이 작가의 '파고'는 작가가 경험한 출산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파동을 10편(모든 작품 2025년작)의 회화로 선보이는 자리다. 특히 '에피듀럴 모먼트'는 폭 7.2m의 수묵 채색 작품으로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다. 작품 제목은 일명 무통 주사라 불리는 마취제 이름이다. 작가는 출산 과정에서 마취제가 신체에 투입되는 순간의 환각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녹색 안개가 낀 신비로운 산 위로 용 또는 거대한 뱀처럼 보이는 생명체가 꿈틀거린다. 화면 왼쪽에는 벌어진 골반이 보이고, 생명체는 이 사이를 통과하려고 한다.

4개의 화폭을 휘감은 동물의 금빛 비늘이 신비롭게 빛나는 가운데, 곳곳에 해체된 뼈의 형상이 드러난다. 극심한 진통의 과정 가운데 주입된 환상적 기억은 출산이라는 행위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신체적, 정서적 마취 상태를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이은실 작가는 "고통 속에서 마약성 진통제를 맞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파편화된 순간을 그린 것"이라며 "전쟁터 같은 상황인데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작용이 일어나는, 신체적 고통에 환상이 주입된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가의 회화는 출산의 과정 속에서 겪은 폭발적인 응집과 분열의 힘을 경이로운 자연 현상에 비유하는 시각적 방법론을 취한다.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자연에 중첩하는 시도를 통해 주제는 여성적 서사에 머무르는 대신, 인간 존재의 육체적, 정신적 외상과 그 회복의 가능성에 확장된다.

또 다른 대표작 '전운'과 '인생의 소용돌이'도 출산 직전에 나타나는 진통을 잘 표현한 작품이다. 푸른 안료를 중첩해 깊은 바다의 빛깔을 구현하고, 수면 위에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다.

'전운'에서는 풍랑이 다가올 바다의 풍경으로 통증의 전조 증상을 표현했다면, '인생의 소용돌이'는 강력한 소용돌이로 분만을 알리는 '진진통'을 그렸다. 또 '멈추지 않는 협곡'과 '생사의 기로'이란 작품은 출산 과정에서 벌어지는 출혈을 용암이 흐르는 모습처럼 담았다.
이외에 '고군분투'와 '절개', '흔적', '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는 출산 이후 신체에 남은 흔적들을 작품으로 남겼다. 물리적 압력으로 실핏줄이 터진 눈(고군분투)과 출산 당시 칼로 생살을 벤 흔적(절개), 임신으로 인해 생긴 튼살(흔적), 산후 유선염(넘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태도) 등 일시적으로 발생하거나 타인에게 잘 보이지 않는 상흔을 화면 위로 불러와 직면하게 했다.
이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사회적으로 출산을 고귀하고 숭고한 것이라 하고, 마치 모든 여성이 겪는 보편적인 일이라 하지만 개인에겐 생사를 넘나드는 사건"이라며 "좀 오래된 일이지만 이처럼 강렬한 체험을 작가로서 꼭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